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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N T O L O G Y T H R O U G H O U T T H E H I S T O R Y
역 사 를 통 한 사 진 의 존 재 론 적 고 찰
P H O T O G R A P H Y
2
4~15c 카메라 옵스큐라의 기원
목 차
1807 볼라스톤의 카메라 루시다
1814 조셉 니엡스의 헬리오그래피
1830 다게레오 타입 & 칼로타입(탈보타입)
1 9 0 0 Kodak Camera
1840 ~1890 사실주의 & 회화주의 (픽토리얼리즘)
1 9 0 2 The Photo Secession ( 미 국 )
1920 다다이즘 / 초현실주의 / 아방가르드 (유럽)
1960~ 1980 팝아트 / 퍼포먼스/ 개념미술
사진이론 구체화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에 대하여 & 연구(작업)방향
1990~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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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c 카메라 옵스큐라의 기원
카메라 옵스큐라의 기원은 무려 2천 년 전의 중국과 고대 이집트, 인도 혹은 폼페이 유적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렌즈
형태로 된 유리조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카메라 옵스큐라와 관련된 단편적인 역사적자료들을 통해 우리는 서양
과 동양에서 당시 사람들이 빛에 대한 광학현상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역사적 진술을 다만 추측에 불과할 뿐이며 현재까지 인정되는 카메라의 역사, 즉 카메라 옵스큐
라의 역사는 오로지 기록에 의해 확인되는 것만 인정된다. 문헌으로 암시된 가장 오래된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는 아
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 이 이론으로부터 영감 받은 11세기 아라비아의 알하젠의 언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알하젠은
이러한 빛의 원리를 태양이 부분일식에서 발견하고 있다.
" 부분일식이 시작되어 빛이 둥글고 작은 구멍을 통해 평평한 면에 투사되면 태양은 초승달로 나타난다. 이
러한 경우는 빝이 통과하는 구멍이 아주 작은 경우에서만 가능하다."
아라비아 학자들은 당시 연금술과 광학에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이 언급한 것은 단지 자연 현상일 뿐 결
코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에 대한 설명을 아니었다. 후에 13세기 프란체스코 수사인 로저 베이컨이 적은 글 속에서
작은 도표와 함께 다시 태양의 일식에 대해서 설명하게 되는데 당시에는 아무도 그것이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로저 베이컨은 빛 전달의 법칙을 연구하면서 1267년 자신의 글에 구멍을 지나는 태양 빛
파장들이 서로 교차되어 벽면에 투사되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준다. 즉 빛은 어떤 좁은 구멍을 관통할 때 언제나 둥근
자국 형태로 투사되고 구멍의 모양에 상관없이 구멍이 클수록 태양의 자국은 점점 커진다.
1. 로저 베이컨의 다양한 스펙트럼, 1267
Sol
Foramen
Paries
4
e d c b a
n omr
p q
t k i h g f s
2.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카메라 옵스큐라 원리, 1519년 이전
4~15c 카메라 옵스큐라의 기원
하지만 카메라 옵스큐라가 13세기 베이컨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사실상 카메
라 옵스큐라의 <구체적인 설명>자체는 당시 그들의 기록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문헌에 기록된 카메라 옵스큐라의 구체적인 진술은 중세의 어두운 암흑기인 14-15세기를
지나 새로운 빛의 시대가 도래하는 16세기 때부터 나온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16세기에 만들
어져 17세기에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원리의 최초의 진술자는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
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다. 그러나 그의 진술은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진다.
그가 생전에 남긴 방대한 양의 노트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 밝은 대상들의 이미지가 어두운 방의 작은 구멍으로 들어갈 때, 이미지는 방안에서 구멍
과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하얀 종이 위에 나타난다. 거기서 색깔과 형태를 가진 모든 대상들을 분
명히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들은 크기가 작아지면서 빛파장의 구획을 근거로 거꾸로 역전되어
나타난다. 이때 태양 빛을 받은 부분으로부터 온 이미지는 얇은 투명한 종이 위에 채색화처럼
나타난다. 이럴 경우 구멍은 철판에 아주 작게 뚫어져야 한다."
다빈치의 기록에서 보여진 도식은 일식과 같은 자연 현상을 설명한 경우와는 달리 정확히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현재 기록으로 남아있는 자료
로서는 다빈치가 최초의 진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초의 발명자라고 단언하기에
는 많은 것들이 아직 불확실한 상태로 과거에 묻혀 있다는 게 현재의 통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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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타나시우스 키르케의 이동용 카메라 옵스큐라, 16463. 샤이너의 천문 관찰용 카메라 옵스큐라, 1612
4~15c 카메라 옵스큐라의 기원
카메라 옵스큐라는 16세기에 이미 어두운 방, 렌즈, 거울, 조리개 등 오늘날 카메라의 기본이 되는 근본적인 구조와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형태는 17세기를 지나면서
보다 작고, 보다 편리하고, 보다 신속히 이동할 수 있는 모양으로 바뀌었을 뿐 거의 변하지 않았다. 16세기의 카메라 옵스튜라는 알다시피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실제 방>이었
기 때문에 사실상 사용하기가 아주 불편했다. 그리하여 17세기 초부터 이러한 불편을 해결하려는 시도로서 움직일 수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가 여러 가지 형태로 고안되어 등
장하게 된다. 그 과도기적 시기 중에서도 오늘날 잘 알려져 있는 거울이 달린 이동식 카메라 옵스큐라에 가장 근접한 형태로 키르케가 만든 커다랗고 밀폐된 상자와 샤이너가
고안해낸 천문학을 위한 관찰용 기구로서 기다란 대롱이 달린 장치였다.
17세기 중엽부터 점진적으로 학자들은 이 장치의 발전 가능성과 유용성을 인지하면서 실질적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카메라 옵스큐라 만들기에 착수하였다. 그리
하여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러서 카메라는 두 개의 상자를 잇대어 한 끝에는 렌즈를, 다른 한 끝에는 광택을 없앤 종이나 젖빛 유리를 끼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카메라 바깥
쪽에서 렌즈를 통해 이 젖빛 유리판에 맺힌 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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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사물의 윤곽을 따라 드로잉하는 모습5. 카메라 루시다를 이용하여 소묘하는 모습
보다 더 완벽하게 개량된 형태는 현대적인 반사경식 카메라를 닮은 것으로서, 상자의 윗부분에 젖빛 유리가 씌워졌고 그 밑에 사십오 도 각도로 장치된 거울의 반사로 유리 위에
상이 비취었다. 이 카메라는 상의 위 아래가 거꾸로 뒤집히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었으므로, 젖빛 유리 위에 얇은 동이를 얹어 그 상을 따라 그려낼 수 있었다. 6
중산계층은 초상화를 원했다. 오랜 예술적 훈련을 거치지 않고서도 그러한 요구를 들어 주게 될 기술적 장치들이 속속 연구, 개발되었다. 그럼으로써, 비록 예술가는 못 될망
정 누구나 화공의 솜씨에 비할 만한 그림을 제작할 수 있었다. 이때 등장한 '실루엣 그림'은, 단지 그림자의 윤곽을 따라 그릴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되었다. 1786년 질-루이 크레
티앙 (Gilles-Louis Chretien)이 '자동 전자식 초상 제작기'를 발명하면서, 초보자라도 누구나 동판 위에 음각 미세초상화(미니어쳐)를 제작하여 그 그림들을 복제, 인쇄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영국 과학자 윌리엄 하이드 울러스턴(William Hyde Wollanston)은 이보다 더욱 세련된 예술적 솜씨를 보이게 될 기술적 장치를 고안하게 되는게 이것이 바로
1807년에 소개된 '카메라 루시다'이다.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라는 뜻의 카메라 옵스큐라와 반대로 ‘밝은 방’이라는 의미인 카메라 루시다는 조절 가능한 스텐드에 네 개의 프리즘
을 장착한 것으로 사용자는 프리즘을 통해 대상의 이미지를 화면위에서 보면서 그려낼 수 있었다.5
하지만 카메라 루시다는 여전히 프리즘을 통해 투영된 이미지를 손으로 베낀다
는 점에서 드로잉의 방법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대상의 정확한 묘사라는 드로잉의 목표에 있어서 그 정확도를 보장할 수는 없었다. 손으로 하는 드로잉의 한계를 넘어 보다 정확한
대상의 이미지를 얻고자 하는 화가들의 열망은, 이후의 많은 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더 발전된 이미지 전사방법을 고안하게 하는 동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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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Camera Lucida in original Shagreen case by Dolland, 1820, London
1807 울러스턴의 카메라 루시다
편명하게 놓은 종이 위에 놋쇠로 만든 가늠자가 세워져 있고, 이 가늠자 위에 유리 프리
즘이 눈높이로 걸려 있으며, 사용자는 프리즘 모서리에 중심이 맞춰진 작은 구멍을 통해
모델과 종이를 동시에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연필로 실제 이미지를 종이 위에서
따라 그려 갈 수 있었다. 단지 그 이름과 기능에 있어서만 카메라 옵스큐라와 유사했던
카메라 루시다는 이동이 간편했기 때문에 여행자들에게 널리 애용되었다. 하지만 여전
히 소묘하는데 있어 근소하나마 스케치하는 작업자에게 숙련된 솜씨를 요구했다.
이 때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카메라 옵스큐라와 카메라 루시다라는 물리적 장치의
도움으로 자연을 보다 더 정확하게 모사할 수 있게 되었고, 사실성에 대한 갈증이 전 보
다 더 충족되자, 사람들은 이제 사실과 모사의 간극을 사람의 손에 쥐어진 연필로 좁힌
다는 것에 더욱 갑갑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직 자연이라는 연필만이 사실을 있는 그대
로 그려낼 수 있었으니, 사람들은 점점 자연스럽게 <손으로 그리지 않고서도 빛 스스로
가 카메라 속에 맺힌 상을 그리도록> 해야 한다는 동일한 이상들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러한 기계를 발명하기 위한 연구들이 적극적으로 시도되기 시작했다.
8
1814 조셉 니엡스의 헬리오그래피
8. "Camera obscura" of Nièpce with installed equipments as first
photo-camera (box-camera) about 1825.
석판인쇄술의 새로운 공정에 관심을 갖고 있던 니엡스는 이를 이용해 카메라
옵스큐라로부터 자연의 모습을 복사하려고 여러번 시도한 끝에 1820년 초에 빛을 쐬면 굳어지는
일종의 아스팔트인 주데아 비투멘을 이용하여 그 혼합물로 감광지를 만들었다. 그것을 옵스큐라
속에 넣고 창가로 가서 그의 안뜰을 향해 8시간동안 노출하여 최초의 사진이 만들어진다.
그는 아직 빛에 노출되지 않은 그러나 빛에 민감한 부분을 제거함으로써 이미지를 영원히
고정시키는데 성공한다. 이것을 헬리오그라프(heliopraph, 그리스어로 헬리오는 '태양'을,
그라포스는 '그림그리기'라는 뜻을 나타낸다)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지의 질은 만족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니엡스의 작업은 다게르에게 전해지고 당시 디오라마(diorama : 특수조명과 대형의
투명그림을 이용해 환상적인 효과로 경치를 재현함)로 장관을 묘사하는데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하고 있던 그는 이미지 보존을 위한 니엡스의 시도에 흥미를 가지고 1829년부터 니엡스와
공동연구를 시작한다.
19세기 중반은 사진과 같은 발명품의 성숙기였다. 서양에서는 그 당시 부를 축적하여
새롭게 상승된 부르조아지가 사진을 갖기를 원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이제까지 오직 특별한
사람들만 가질 수 있었던 가족사진을 원했다. 또한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여건이 허락되면 여행을 하여 멀리 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여행 안내서나 사진을 구입하였다. 니엡스는 그 이후로 사진이 사회에 주게 될 큰 충격을
볼때까지 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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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니세포르 니엡스 <식탁> 1827년경. 엘리오그라프. 소실. 다반과 모리스의 뷔케의 도록 「1900년 만
국박람회의 사진회고전시장」(파리,1903)에서
9. 니세포르 니엡스 <르 그라의 집 창에서 내다본 조망> 1827년경. 엘리오그라프. 게른
샤임 소장품. 텍사스 대학 인문학연구소, 오스틴.
니엡스의 여러 시도들 중 성공적이었던 최초의 사진은 샬롱-쉬르-손 근방의 생 루 드 바렌마을에 있는 그의 저태 '르 그라'의 위층 창에서 잡은 실경으로,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사진이다. 노출은
대략 여덟 시간 가까이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동안 태양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해 가면서 건물의 양편을 모두 비추었고, 따라서 건물의 입체감은 잘 나타나 있지 않다. 또한 이미지는 마치 거
울 속에서처럼 왼편과 오름편의 자리가 뒤바뀌어 있다.
이보다 한층 더 성공적인 유리감광판 위의 그림-음식을 차려놓은 식탁의 모습-을 니엡스 가족의 한 사람이 1890년 프랑스 사진협회에 제출했다. 소재로 쓰인 물건들-병, 칼, 스푼, 주발과 양
념통, 포도주잔, 빵 한조각-은 하이라이트와 중간 톤, 그리고 형태를 감싸고 있는 그늘로 인해 뚜렷이 구별되어 보인다. 이 이미지는 협회의 연감에 수록된 도판으로만 남아 있는데 다소 거친 중간
톤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의 유리 원판은 혐회에 소장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수수께끼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정물이 제작된 날짜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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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 다게레오 타입 & 칼로타입(탈보타입)
1827년 니엡스가 병중에 있던 형을 방문하러 런던으로 가는 여행 도중 파리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화가였던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를 방문하게 된다. 다게르
또한 '빛의 자연발생적 작용'에 의해 카메라의 상을 잡아 보여고 연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무대장치가로서 오페라와 대중 연극을 위한 무대장치를 그리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인물이었고, 따라서 회화적 장치를 제작하는 가운데, 원근법에 정확하게 들어맞도록 하기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를 빈번히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장치들과 친숙했던 탓에 다게르가 사진에 관한 니엡스의 실험에 끌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들의 관계는 지속되어 갔고 1829년 12월 4일, 니엡스와 다
게르는 향후 십년에 걸친 동업 계약에 서명하게 된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사년 뒤에 니엡스는 세상을 떠나게 되고 다게르는 홀로 일을 진행시켜 나간다.
1837년 다게르는 꽤 성공적인 사진을 만들어 낸다. 여러 학술지와 협회에서 다게르의 발명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에
열렬한 흥미를 보이며 다게레오 타입은 인기를 누리게 됬지만 곧이어 한계점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한가지 이유는
이 사진술이 우선 초상화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게르의 은판 사진술은 초기에는 주로
건축물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노출시간으로는 사람들을 촬영할 수 없었고 초기의 혁명적인 발명에도 불구하고 다게르는
자신의 발명을 더 이상 보완하지 못해 좌절한다. 그는 초상사진으로서의 기술적 진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다시 옛날로
돌아가 화가의 붓을 잡고 무대장치를 그리며 1851년에 생을 마감한다.
그 후 다게레오타입의 기술적 진보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독일의 페터 프리드리히 포크틀렌더가 오늘날 f/3.6에
해당되는 개량렌즈를 고안해냄으로 기존의 렌즈보다 스물두 배나 더 밝은 이미지를 얻는데 기여했고, 영국의 좀 프레드릭 고더드가
옥소 대신 할로겐으로 옥화/표면처리한 감광판을 제작함으로써 빛에 대한 감광도가 증가되고 그러한 '촉성재'의 사용으로 평균
일 분 이내에 초상사진을 활영하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해 진 것이다. 또한 프랑스인 이폴리트 루이 피조가 감광판을 도금함으
로써 다게레오타입의 명암이 풍부해졌다.
초상사진관들은 서구의 전 지역에서 개장되기에 이르렀고 1855년 6월 초까지만 하더라도 한해 동안 무려
603,626점의 다게레오타입들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 앉을 수 있었고 제작비가
저렴해졌으므로 경제적 신분의 차이가 문제될 리도 없었다.
11. 다게레오 타입,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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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 <정물> 1837. 다게레오 타입. 프랑스 사진협회, 파리.
석고상들, 고리버들로 감싸인 병,그림틀, 그리고
천이 드리워진 정물사진. 이 깜짝 놀랄 만한 그림
에는 세부가 충실히 살아 있고, 하이라이트와 그
림자 사이에 밝기의 점진적 차이가 고르게 나타나
있으며, 재질감과 윤곽, 양감 그 모두가 실감나게
드러나 있다. 다게르가 다게레오 타입이라 불렀던
것들 가운데 가장 초기의 본보기인 이 사진 이미
지는, 그림 제작에 혁명을 일으켰던 새로운 그래
픽 매체의 잠재력을 대변한다.
12
1830 다게레오 타입 & 칼로타입(탈보타입)
다게레오 타입과 비슷한 시기, 1841년 영국인 폭스 탤벗 (William Henry Fox Talbot)이 종이음화 (오늘날의 네거티브)를 사용하는 방법을 통해 고안해 낸 카메라를 칼
로타입, 혹은 후에 칼로타입의 발명자 탤벗의 이름을 따서 탈보타입이라고 부르는 카메라를 고안해 낸다. 요오드화은을 종이섬유 사이에 침투시켜 갈륨산(gallic acid)을
사용해서 현상하는 방법으로 다게르의 발명인 은판사진(다게레오타입)은 좌우역상의 한장의 사진밖에 만들 수 없지만 이 칼로타입은 완성된 종이음화를 다시 복사해서 몇
장이라도 종이양화사진을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네거티브에서 포지티브를 얻는 현대적 사진의 공정을 최초로 사용한 사진술로 다게레오 타입보다는 칼로 타입이
현재에 사용하고 있는 사진의 성질과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탈봇은 다게르의 발명에 관한 소식을 학술지의 회의 보고서를 통해 우연히 접하고 경악하였다고 한다. 영국의 과학자요, 수학자, 식물학자, 언어학자이자 고전학자였
던 그는 다게르의 발명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술을 이미 독자적으로 개발했었기 때문이다. 1835년 자신이 종이음화로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던 그
작업을 서둘러 발표하며 우선권을 선언하고 다게르의 발명공포에 클레임을 제기하였으나 오랜 공방 끝에도 우선권은 인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칼로타입 사진술이 거둔 최초의 예술적 성공은 데이비드 옥타비우스 힐과 로버트 애덤슨이라는 전직 초상화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짧았던 협력기간을 통해
천오백 점 이상의 음화를 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 가장 뛰어난 칼로타입 가운데 하나는 뉴헤이번 근처의 어부들을 있는 그대로 소박하게 찍은 초상들이 있다.
13. Calotype cameras, used by Talbot - 1835 to 1839
그들은 피사체를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았고 음영의 단순한 양감으로 구성했는
데, 이는 그들이 칼로타입이라는 매체의 속성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존중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1848년 힐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화지 전반에 걸쳐 거진 표면과 고르지 못한 질감이, 칼로타입
이 다게레오타입에 비할 떼, 세밀한 곳에 실패를 가져오는 주요
인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칼로타입의 강점이기도 하다. 너무나
완벽한 신의 작품이 아니라, 마치 인간의 손으로 빚어진 미완의
작업 그 자체로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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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윌리엄 헨리 폭스 톨벗 <건초더미> 1843. 칼로타입 음화의 염화은판 사진. 폭스 톨벗 박물관, 영국
하지만 칼로타입이 주로 사용된 분야는 초상사진이
아니라 건축과 풍경의 기록이다. 톨벗이 발명한 칼
로타입은 프랑스로 건너가 그곳에서 특허를 얻긴
했지만 그는 그 권리를 확실하게 주장하진 않았고
그로인해 칼로타입은 프랑스에서 보다 널리 사용되
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인들에 의해 칼보타입
은 두 종류의 중요한 기술적 개선을 이룩하게 된다.
그 중에 하나는 음화의 재료로 쓰이는 종이를
감광처리하기에 <앞서> 밀랍을 입히는 기법이었는
데, 이것은 노출 과정에서의 부족분이나 과잉을 현
상과정에서 충분히 보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다른 하나는 책과 앨범 등에 사용하기 위한 보
제사진의 대량생산이 그것이다. 루이 데지레 블랑
카르-에브라르가 인화시간을 태양광선 아래에서는
육 초, 그늘에서는 삼십 내지 사십초로 단축시킨 인
화기를 개발해 낸 것이다.이에 따라 하루에 사천 점
씩 인화해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14
16. 로버트 코넬리어스 <자화상> 1839. 다게레오 타입. 개인소장. 필라델피아15. 샤를 네그르 <노트르담 성당의 앙리 르 세크> 1851. 칼로타입 음화의 염화은
판 사진. 앙드레 잠 소장, 파리
다게레오 타입의 단점 : 감광판 자체가 한장의 사진이므로(복제 불가능)
표면의 취약/ 견고하지 못했던 보관의 난제/ 고가/ 장시간 노출 다게레오
타입에서 사용한 셔터방식: 캡 셔터
칼로타입의 단점 : 종이 네가사용에 따른 인화지 전반에 걸친 표면과
고르지 못한 질감 - 다게레오 타입의 효과에 견주지 못함(화질이
떨어짐) : 미국인들이 다게레오 타입을 더 선호
15
1840 ~1890 사실주의 & 회화주의 (픽토리얼리즘)
17. Peter Henry
Emerson. Blackshore,
River Blythe, Suffolk
from Emerson's
illustrated book
'Pictures of East
Anglian Life', 1888
18. Henry Peach
Robinson. When The
Day's Work Is Done.
1877 Combination
print (혼합인쇄) made
from six different
negatives
사진이 등장하고 확산되면서 <사실 그대로의 재현>이라는 사진의 매체적 특성은, 사진이 갖고 있는 장점인 동시에 예술로 받아들여 질 수 없는 한계가 되기
도 했다. 때문에 이 당시에 사람들은 사진을 좀 더 회화처럼, 그림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시도들을 한다. <고무 인화법>이라는 방법은 그러한 시도들 중 하
나로 네거티브필름에 채색과 수정을 하는, 오늘날로 보면 <포토샵작업>과도 같은 개념의 후가공 과정이 행해지기도 했으며 <혼합 인쇄법>이라는 방법으로
2개 이상의 필름을 겹쳐 풍경사진에 사람형상을 넣기도 하는 등의 방법들을 이용하게 된다. 당시 회화에서 성행했던 라파엘전파 미술의 화풍의 영향을 받아
사진들도 그러한 모습으로 제작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사진의 경향성은 회화주의 혹은 픽토리얼리즘이라 불려지며 <Linked Ring Brotherhood> 라는
픽토리얼리즘파 모임단체가 형성되기도 했는데 영국의 헨리 피치 로빈슨(Henry Peach Robinson)과 피터 헨리 에머슨(Peter Henry Emerson)이 대표
적인 픽토리얼리즘 경향의 사진가들이었다. 이 시기에 사진에 대해 행해졌던 방법들은 비록 회화를 그대로 따라 가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점차적으로 <사실을 그대로 재현> 에 내는 기능에서 벗어나 예술적인 시도들을 할 수 있는 매체로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16
1840 ~1890 사실주의 & 회화주의 (픽토리얼리즘)
사진이 예술가층의 사람들로 부터 회화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예술적 매체로서 시도되었던 것을 픽토리얼리즘이라고 한다면, 또 다른 한편으로 사
진 발명 초기부터 초상사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던 특성 그 자체, 즉 <기록>으로서의 사진, 현실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의 이미지,
사실을 기록하고 남겨두는 것에 충실한 사실 그대로서의 사진이 있다. 이렇게 사진은 두가지 측면의 경향으로 나누어 지기 시작했고 각기 다른 방
법과 모습으로 발전해 갔다. 사실주의 입각한 사진들은 주로 초상사진이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되면서부터 점차 그 특징과 정체성이 드러나게 되
는데, 3,4개의 렌즈를 사용해 한장의 사진에 여러모습들을 담아 내는 초상사진들은 오늘날 명함판사진과도 같은 형식을 통해 발전되어 간다.
사진은 또한 인류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수단으로도 적극 사용되기 시작하는데, 미지의 곳을 탐험하거나 지리적인 실측을 하는 등의 학문적인
영역에서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다. 티모시 오설리반 (Timothy O'sullivan) 은 현상 그대로의 흔적, 방문했던 지역에 대한 모습, 그곳에 거주하는
낯선 원주민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포토그래퍼이다.
20. Andre-Adolphe Eugene
Disderi. un-cut carte-de-visite
sheet (명함판 사진). 1854
19. Timothy O'sullivan. Native
Americans. The Pah-Ute(Paiute)
Indian group, near Cedar, Utah
in a Picture from 1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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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 ~1890 사실주의 & 회화주의 (픽토리얼리즘)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는 범죄자의 사진 유형의 발단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골턴과 베르티용의 두상사진. 사람의 두상을 측면과 정면에서 찍어 어
떤 통계자료나 연구자료, 혹은 범죄자들을 분류하고 조사하는 수사자료로 사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당시 통계학자이자 경찰국에 근무하기도
했던 베르티용은 사람의 두상을 실측하기도 하고 신체의 여러 부위들을 비교, 분류 하는 등의 인체측정술을 도입하여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고
범인을 검거하는데 최초로 사진을 사용해 상습적인 범죄자들을 분류하는 등의 성과를 낸다. 골턴의 <유태인타입>은 인종차별의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지만, 훗날 베르티용과 골턴의 사진형태는 뒤샹의 예술작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뒤샹은 이러한 유형적 사진에 착안을 해서
자신의 작품에 이용한다.
22. 23. 베르티용(Alphonse
Bertillon), Galton. 1893. 인체측정
(anthropometry). 1890's
21. 골턴(Francis Glaton), The Jewish
Type. 합성초상 (Composite Portrait).
1877-1896
18
이 시기의 사진의 입지는 상당히 과도기적인 과정을 겪고 있었다. 사진의 등장 이후 점점 대중들 사이에서도 사용의 빈도가 높아짐에따라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
해 그것이 갖는 실재성이란 속성과 예술가적 가치 사이의 끊임없는 경쟁이 이루어 졌다. 즉, 실재성과 예술성 사이의 관계이다. 이 화두는 사진의 초기역사부터 논
의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사실과 객관에 근거한 이러한 사진의 속성이 비-예술적요소 였음이 분명하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실재의 모사라는
사진의 속성이 예술성의 차원에서 부정적 가치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뒤봐(Philippe Dubois)는 사진이 처음 등장했던 당시 의 주도적 반응을 이렇게 정리했다.
"손을 거치지 않은 이미지는 예술가의 땀과 영감, 그리고 손재주의 생산물인 예술작품과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사진이 출현된 당시 사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표방한 적대적 비평가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사진을 예술적 상상을 파괴하고자 협박하는 반-예술이라 여겼던 것이다.
혹은 사진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되, 회화의 부속물로 여기는 관점들도 있었다. 텐느(Hippolyte Taine)는 사진을 대상의 형태를 실수 없이 탁월하게 모사하
는 예술로 인식했다. 그러나 그가 '예술’이라고 언급했을지라도 사진을 예술로 본 것은 아니었고 <회화 예술에 유용한 하나의 도구>로서 여겼을 뿐이었다. 그는 궁
극적으로 사진은 절대로 그림과 비교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사진 반론자 중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혹독했던 사람은 프랑스 <낭만주의>시인 샤
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였다. 1859년 미술 살롱전과 관련된 글에서 그는 사진이 <미술의 아주 소박한 시녀>라는 극단적 발언을 했다. 그는 사진의 사
실성과 복제성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이는 그의 사실주의에 대한 공격과 일맥상통한다. 그것은 '역사' 혹은 '픽션'이라는점이다. 그는 여기서 소설이 역사보다 훨씬
더 ‘진실할’ 수 있듯이, 회화적이고 상상적인 초상화가 자세한 드로잉보다 모델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카메라가 여러 분야의 학자들에 의해 기술적 진보를 거듭해 가며 실제 대상들을 똑같이 구현해 내는데 발전을 거듭해 갈 수록 회화가 사
물을 그로 재현해내야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 나는 데에 사진이 일조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진이 회화에게 표현상의 해방을 촉진시켰다는 뜻이다. 특히, 입체
주의와 추상미술의 탄생에 사진의 기여를 절 빼놓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진보적' 화가들은 사진을 '해방'으로 여겼다. 사진은 재현적 회화를 제작해야 하는 필요
와 부담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반대의 양상에서 전개된 것이 바로 회화주의(pictorialism)이고, 실재의 모방에 반하여 사진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이 움직임은 사진의 예술성을 부각시
키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는 19세기 사진사에서 객관적 사실구현이라는 사진의 일차적 기능에 대하여 자체의 부정적 인식을 반영한다. 1880년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번성했던 회화주의의 본질적 의도는 사진을 고급예술(high art)의 면모와 용도를 갖추게 하려는 것이었다.
1840 ~1890 사실주의 & 회화주의 (픽토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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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 0 0 Kodak Camera
카메라는 이제 손 안에 쥐어질 만한 부피로 축소 되었다. 사진가들은 삼각대를 갖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종류의 휴대용 카메라들이 시장
에 진을 쳤다. 판매 중인 이 엄청난 핸드 카메라를 선택하려고 로빈슨이라는 사람은 제비뽑기를 하기도 했다. "작은 종이에 나누어 거의 <오백여>종의 핸드 카메라의
이름을 쓰고는, 모자에 집어넣고 어린애한테 그 중 하나를 꺼내도록 해서 그것을 구입했습니다. 참 다행스런 묘안이었지요. 똑같은 거을 사기 위해 거의 천가지에 달
하는 방법으로 따져 본다는 곤혹스럽고 고약한 일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로빈슨이 쓴 글에서 우리는 당시 카메라를 고르는일이 <곤혹스럽고 고약한 일>로 여겨질만
큼 그 종류가 엄청났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카메라들 가운데에서 가장 잘 기억되는 것이 바로 코닥이다. 뉴욕 로체스터의 건판 제조자인 조지 이스트먼(George Eastman)이 개발하여 상품화시킨
이 카메라는 1888년에 처음 시장에 나왔다. 그가 설명하길 Kodak이라는 상호는 전 세계 어느 언어권의 사람이 읽어도 똑같이
'코닥'이라고 발음할 수 있도록 알파벳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는 또 산업의 제국화 전략에서도 주목받은 작명술이었다.
"순전히 임의로 글자를 짜 맞춰 지은 것입니다. 어떤 기존 낱말 전체나 일부를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상표 이름의 제 조건을 고루 갖출 수 있는 단어를 상당히 궁리한 끝에 그렇게 정했습니다. 짧은 단어
여야 한다는 것이 우성적인 원칙이었습니다. 잘못 표기하여 그 정체응 오도하게 될 가능성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신하고 특출한 개성도 있어야 했고, 외국의 다양한 등록상표법에도 맞아야 했습니다."
원래의 코닥은 상자형 카메라였다. 3.25x3.75x6.5인치 크기에, 초점거리는 이십칠 밀리미터, 조리개는 f/9로
기발한 원통형 셔터를 갖고 있었다. 여타의 경쟁 상품과 다른 점은 백장의 음화가 장전될 만큼 긴 두루마리
필름을 사용했고, 각각의 음화들은 직경 2.5인치의 원형인 점이었다. 코닥의 이러한 초창기 카메라 모델은
브라우니(Brownie)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24. A Kodak Box Brownie Camera,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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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 0 0 Kodak Camera
이스트먼의 가장 큰 업적은 카메라 디자인이라기보다는 고객들에게 사진
마무리작업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한 점에 있었다. 카메라는 필름이 내장
되어 판매되었다. 그 가격은 25달러로 현상,인화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
다. 잘 찍힌 음화로부터 밀착 인화한 사진이 금테 두른 초콜릿빛 카드 위
에 깔끔하게 끼워져 구매자에게 되돌려 지는 것이다. 이것은 <브라우니
앨범>이라고 불리며 현재에 우리가 알고있는 사진앨범과도 같은 프레임
에 끼워진 사진들을 모은 한권의 책이었다. 이렇게 코닥은 굉장히 지능적
이고 상업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대중들을 사로잡았고, 코닥의 유명한 슬
로건 <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 당신은 셔터만 눌러
라, 나머지는 우리가 한다, 라는 광고문구는 매우 적확하게 대중들 속으
로 파고들었다. 더이상 전문적 작업실이 불필요해졌고 거추장스런 장비
들과 까다로운 기술로부터 자유로워져, 사람들은 이제 모든 종류의 소재
들, 소풍이나 외출시의 꾸밈 없는 기록들, 멀리 떨어져 있거나 오직 여행
중에만 볼 수 있을 것들과 같이 일상을 촬영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리고 이러한 일상의 매체가 된 사진은 1900년대 초반 1차세계대전 무렵
전장에 나간 아들과 가족 친구들간의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 되기도 했
고, 인간의 삶 속에 중요한 소통의 매개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25. A Kodak Camera advertisement appeared in the first issue of The
Photographic Herald and Amateur Sportsman, November, 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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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 0 2 The Photo Secession 사진 분리파 ( 미 국 )
모든 대중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면서 사진은 또 다른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대중들이 찍어대는 일상의 가벼운 사진과는 다른 차별화된, 하지만 동시에 사진이
회화를 닮으려는 과거의 노력과도 대조를 이루는, 사진의 <순수 형식>, 사진의 예술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생겨나게 된다. 특히 미국에서는 사진의 매체적 속성 자체를 예술성으로
한층 더 끌어 올리려는 노력이 두드러졌다. 진보적 사진작가들에 의해 사진 매체의 고유한
특성을 살린 ‘스트레이트’ 사진이라 불리는 하나의 사진양식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의
슬로건은 ‘형태가 기능을 따른다’ 는 것이었다. 이들은 회화주의 작업에 두드러지는
조작과 인위성을 피하고자 한다. 회화주의 사진작가들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갖고 회화의
표면 텍스쳐를 모방하려 했던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진의 매체적 특성을 그대로
예술로 만드는 순수 사진에 대한 칭송이 커졌다. 이 시기에 사진 언론에는 많은 글이
올라왔는데, 그 중 1904년 미술 비평가 하트만 (Sadakichi Hartmann)은 수작업이
많이 개입된 회화적 작업을 비난하며, 직접적으로 작업 하는 방식을 주창한다. 20세기
초에 새로운 혁신은 스트레이트 사진을 소위 <합법적 미술매체>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사진의 예술성에 관한 논란에 있어, 사진의 독자적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이 움직임에는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가 중심에 있다. 그는 사진의 회화주의 운동과 결별하고,
스트레이트 사진(straight photography), 혹은 순수사진(pure photography)을
사진의 새로운 방향으로 설정한다. 스티글리츠는 1902년 뉴욕에서 사진분리파(Photo-
secession)를 구성하고, 1903년에 창간한 공식적인 계간지『카메라 워크』를 통해
사진이 회화에 버금가는 독립적 예술임을 주장한다.
26. Alfred Stieglitz (1864–1946) , The Steerage,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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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 0 2 The Photo Secession 사진 분리파 ( 미 국 )
27. Edward Weston, Cabbage Leaf, 1931. 28. Edward Weston. Nude. 1926.
사진 분리파는 글자 그대로, 대중들의 일상사진과 회화주의 사진이 갖는 수동적 기능으로서의 사진에서 <분리> 되자! 는 목적으로 사진의 미학을 점차적으로 고
양시켜 나갔다. 사진의 형태미, 매체의 연구등을 통해 정교하고 섬세하면서도 아름다운 형식들로 발전되어 간다. 분리파를 기점으로 사진의 모더니즘이 전개되던
이 시기는 사진의 형태와 형식, 구성들이 중요시 되었다.
23
1 9 0 2 The Photo Secession 사진 분리파 ( 미 국 )
29. Paul Strand, Wall Street, New York, 1915 30. Paul Strand. Abstraction, Porch Shadows . 1916
사진 분리파의 구심점이 된 화랑은 뉴욕 5번 가의 ‘291 갤러리’ 이다. 이 계통의 작가들로 스타이켄(Edward Steichen), 에반스(Walker Evans), 웨스톤(Edward Weston), 아담스
(Ansel Adams) 등이있다. 사진 분리파와 291 갤러리의 활동은 1917년에 마무리되었지만, 놀랍도록 직접적이고 심도있는 사진작품은 이 후에도 계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24
1920년 후반의 이렇듯 증가되는 스트레이트 사진에 대한 인식은 과거에 잊혀졌던 작가의 재발굴을 초래하기도 한다. 사진의 전설적
인물인 유젠 앗제(Jean Eugène Auguste Atget)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가 1898년 이래 찍은 수천 점의 사진 중 단 한 점도 살롱이나
사진 잡지에 공개되지 않았었다. 그의 작업은 사진가들이 아닌, 멜랑콜리한 이미지를 추구했던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서 알려지게 된다.
사진을 형상만을 가지고 두가지의 큰 축으로 나누어 인물과 풍경사진으로 본다면, 훗날 발터 벤야민이 극찬을 했던 사진가들도 당시
유젠 앗제와 아우구스트 잔더라고 하는 풍경과 인물사진가이다. 이들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사람들에게 가장 가깝고 친근한 대상들,
일상의 것들 속에서 사진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아우라를 이끌어 내며 붙잡을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정지되고 얼어 붙은 결정의 순간들을
포착해내고 있다. 간과되거나 아무 의미없이 흩어지는 인간 삶의 숨겨진 기호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붙잡아두고 기록하는 것이다.
31. Eugène Atget, Boulevard de
Strasbourg, Corsets, Paris, 1912
32. August Sander Boxers, Paul
Röderstein and Hein Hesse,
Cologne, 1929
25
같은 시기, 각기 다른 나라들이 서로 맞물려 있는 유럽에서는 미국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사진이 발전되고 있었다. 예술과 디자인에서의 다다이즘, 러시아의
구성주의,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적인 전위적이고 실험주의적인 사조들속에서 사진은 곧바로 예술에 적극 수용되었고 변형, 수정, 재구성되며 미국보다는 좀
더 <물리적>이고 <즉각적인>매체로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그 시초로 만 레이가 있는데, 그는 훗날 팝아트 양식에도 영향을 미친 예술역사의 역동기 속의
핵심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오브제와 사진의 결합, 감광지에 빛을 쏘아서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사진을 찍어내는 (만 레이의 이름을 딴) Rayograph 라고
일컫는 포토그램, 라즐로 모홀리나기의 포토 몽타주 등, 우리가 현재 포토샵으로 흔히 하고 있는 거의 모든 작업스타일이 이 시기에 대거 등장하게 된다.
1920 다다이즘 / 초현실주의 / 아방가르드 (유럽)
33. El Lissitzky, The Constructor, 1924/printed 1985. Based on his
self-portrait from 1914.
34. Man Ray, Le Violon d'Ingres, 1924
26
35. Man Ray, Rayograph, 1922
젤라틴 은판 사진. 『매혹적인
들판』(파리, 1922) 에서.
현대미술관, 뉴욕
취리히 다다의 일원인 크리스티안 샤트는 1918년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사진적으로 제작한 추상사진을 만들었다. 톨벗의 최초
사진적 실험으로 돌아가 그 기법을 구사하면서 오려낸 종이나 평면적 오브제들을 감광처리된 종이 위에 올려 놓고 노출시켜, 마치
신문을 오려내거나 접착제로 화폭 위에 이것저것 덧붙여 만든 입체파 콜라주와 거의 같아 보이는 형태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
작업은 만레이와 라즐로 모홀리나기에 의해 한걸음 더 진전되었는데, 전자는 레이요그라프, 후자는 포토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착수되었고, 그들은 감광처리된 종이 위에 입체물을 올려 놓았다. 형태를 이룬 그림자, 또 투명한 오브제일 경우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명백한 자동기술적 효과가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감수성에 어필했다.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제작한 사진> 방식은 현대사진에서도
다시 부활해 몇몇 사진예술가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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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예술가들의 가장 놀라운 기여는 하나의 새로운 시각적 형상을 이루도록 각기 분리되거나 흩어져 있는 그림들을 조합하거나 풀로 붙이는 작업에 있었다. 이 방식은 추상적 구성
속에 주로 신문에서 오려낸 인쇄물을 붙이거나 화폭에 작은 오브제들을 접착시키니는 수법에서 영감을 얻고 있다. 따라서 그 작품들은 콜라주-프랑스어 동사로 콜레(coller), 즉 접착한
다는 뜻에서 파생한-라고 불렸다. 예술적 매체로서의 포토몽타주의 출발은 다다 그룹에서 추적할 수 있다. 천재적 '포토몽타타주 제작가' 존 하트필드의 동생 빌란트 헤르츠펠데는 1920
년 최초의 베를린 다다 전시회 카탈로그에 그 과정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36. 라즐로 모홀리-나기 <질투> 포토몽타주,1927 37. 헤르베르트 베이어 <고독한 도시인>, 1937
"회화는 한때 사물의 외관을 기록해야 한다는,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자
기 눈으로 본다 하더라도 잘 파악할 수 없었던 풍경, 동물, 건물 등의 외관
을 기록해야 한다는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과제는 오늘날
사진과 영화에 넘겨졌고, 이들은 회화가 수행했던 것보다 한층 완벽하게
그러한 목적을 잘 성취하고 있다. 아직까지 이러한 목적의 상실로 인해 회
화가 사멸한 것은 아니며, 다만 새로운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후로 모든 예술적 노력-그 차이점이 얼마나 큰 것이건 간에-은 현실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조류에 편승해 왔다. 다다이즘은 인상주의자와
표현주의자 및 입체파, 그리고 미래파(영화에 양보하기를 원치 않았던)이
면에 원동력이 되어 주었던 사실적인 것을 부정하려는 일체의 시도에 대
한 반동이다.
과거 방대한 양의 애정와 시간과 노력이 회화 속에 어떤 인물과 꽃과 모
자, 그림자 등을 그려 넣는 데 쏟아졌던 반면에, 우리는 단지 가위 한 자루
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회화나 사진으로부터 오려낼 뿐이라고 다
다이스트들은 말한다. 가령 우리에게 작은 크기의 물건이 필요할 경우 그
것을 재현하는 대신 그 오브제 자체, 예를 들어 주머니칼, 재떨이, 책 따위
를 취한다. 낡은 예술의 미술관에는 이렇게 별것 아닌 것들이 아름답게 채
색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그렇더라도 다만 그려져 있을 뿐인 것이다."
28
38. Richard Hamilton. 'Just
what is it that makes today's
homes so different, so
appealing?' ('무엇이 오늘의 우리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
드는가?') 1956
1960~ 1980 팝아트 / 퍼포먼스/ 개념미술
유럽 팝아트의 시작을 알리는 리차드 해밀턴의 대표적인 콜라쥬이다.
예술가 집단들의 활동들이 자신들이 속했던 <예술영역>에서
<사회현상>적 영역으로 확장되어 대중들 속으로 파고 들게 된 아주
중요한 시대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해밀턴은 잡지나 신문등의
대중매체에서 오려낸 조각들을 재료로 콜라쥬로 재구성하여 기존의
이미지가 지니고 있는 의미와는 다른 메세지를 이끌어 냄으로써
대중매체와 소비문화가 현대사회에 미치는 영향력과 왜곡된 진실에
관한 문제들을 담아내려 했다.
이러한 팝아트의 등장이 오늘날 시사하는 점은 바로 사진과
이미지와 같은 예술의 사회적 기능성, 영향에 있다. 과거에 매우
독립적이고 어찌보면 <고립된> 예술가들만의 집단에서 다양한
실험들, 예술을 위한 예술들(Art for Art's sake)을 해왔지만 그들이
이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 세계, 사회, 사람들에 눈을 돌려
관심을 갖고 어떤 실질적이고 의미있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만하고 자아중심적이고 유아론적이었던 예술의
권위적 입지가 상호적이고 관계지향적이고 공생적 관계속으로
(편입이 아닌) 오히려 <확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매우 상징적인
일이었다.
"팝아트는 대중적이고, 일시적이며, 소모적이고, 저가다. 대량생산되고, 젊고, 위트가 있으며, 섹시하고, 교모하며, 매력적인 큰 비지니스다. 20세기 도시 생
활을 하는 예술가는 대중문화의 소비자이며 잠재적으로는 대중문화에 대한 기여자일 수 밖에 없다." - Richard Hamilton
29
39. Andy Warhol, Holly
Solomon 1963-1964,
seven unique gelatin silver,
photobooth prints.
40. Keith Arnatt, Self-Burial
(Television Interference
Project, 1969)
1960~ 1980 팝아트 / 퍼포먼스/ 개념미술
60년대는 사진의 새로운 역사적 변화가 일어났던 분기점이라고들 한다. 50년대까지 회화가 예술의 최고 권위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면, 고급예술, High아트만이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술개념에 대한 전반적인 혁신이 일어났다. Pop Art, 퍼포먼스,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오늘날 우리가 볼 수있는 경향들 대부분은 사실 이 시기에
전부 나오게 된다. 그에 따라 사진의 영역과 외연, 그리고 그 개념과 본질적인 의미조차 다양한 변화들을 겪게 되는데, 물론 과거에서부터 모더니즘 계열의 사진들은 계속해서
발전되어 가고 있었지만 대중매체에서의 잡지나 신문들의 사진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고, 특히 개념미술이나 퍼포먼스 아트와 같이 순간적이거나 일활적으로
행해지는 일들을 기록하는데에도 사진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앤디워홀은 자신의 작업장에 포토부스를 따로 설치해 놓고 일련의 사진들을 셀프로 찍을 수 있도록 하는 오늘날의 <스티커사진>의 시초라고 볼 수도 있을 시도들을
하였는데, 이러한 사진들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반복적 이미지, 배열 등의 특징과도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 하나의 대상을 찍는 데 다른 각도와 시간차를 두고
반복해서 보여주는 이런 특징은 사진이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가 단지 시각적인 효과로만 국한된 것이 아닌, 개념미술에서 볼 수 있는, 예술을 보여주고 표현하는데 있어서
<반복>과<차이>사이의 열려진 틈, <반복>되는 이미지 <속에서> 미세한<차이>들을 발생시키며 그러한 틈새속에서 의미들을 창출해 내는 의미생성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있는것이다.
케이스 아넷의 <자기 무덤파기>라는 퍼포먼스는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도 할수도 있는데, 이 작품은 또한 텔레비젼 인터퍼런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특정
Tv프로그램 상영의 황금시간대에 한장면씩 불시에 몇초씩 끼워넣는 방식으로 기획되어, 대중매체의 상징적 매개물이라고 할 수 있는 TV에까지 현대미술이 스밀수 있는 시도들을
하며 사람들의 삶에 더욱 밀착되어갔고,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아트에 있어서 사진은 기록하고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30
1960~ 1980 신지형학/유형학
41. Lewis Baltz, The New Industrial Parks from the portfolio 'The New
Industrial Parks near Irvine, California, Gelatin Silver Prints, 1974
42. Bernd and Hilla Becher. Gas Tanks, 1983-92
과거 1840-50년대 초기 사실주의 사진에서 모르는곳을 탐험하고 조사하는 인류학적 사진의 경향에서 출발해 발전을 거듭해 90년대 후반 사진에 있어서 어떤 특징적인 하나의
영역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신 지형학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사진 유형들은 사진이 지니고 있는 본질을 살리면서도 실제 사회나 생활속에서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는 독립
적이고 특징적 부류가 된다. 독일의 유형학 사진을 알리게 된 베허 부부의 대표적인 사진들 중에 하나인 <가스탱크>사진은, 독일 지역들의 공장, 산업지대같은 곳의 건설, 변화과
정을 길게는 10년이상의 텀을 두고 제작한 프로젝트성 작품들중 하나로, 오랫동안 관찰하고 기록해 둔 사진들을 배열하고 반복된 이미지들 속 시간의 흐름에 따라 드러나게 되는
각각 개별적인 사진들의 차이, 이것을 통해 어떤 대상들의 유형을 뽑아내는 사진들을 일컬어 유형학이라는 사진의 특정 부류가 탄생하게 된다.
31
1960~ 1980 칼라시진 등장
43. William Eggleston(1939-), Red Ceiling, Greenwood, Mississippi, 1969-71 44. Stephen Shore, Room125, West Bank Motel, Idaho Falls, Idaho, July 18, 1973
사진의 발명이 회화를 재현적인 특성에서 해방시켜 주었던 것처럼, 칼라사진의 등장은 흑백사진이 갖는 모더니즘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벗어나 사진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제
사진가들은 더 이상 흑백의 미묘한 차이, 구도, 각도, 선명도, 프레임에만 천착할 필요가 없었다. 칼라사진은 오늘날의 사진형태에 가장 가깝고도 일상적인 사진들을 훨씬 더 생생
하게 재현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윌리엄 이글스턴과 스티븐 쇼어 (앤디워홀 팩토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던)와 같은 사진작가들은 이러한 칼라사진을 적극 활용하여 자신들 일상
의 면을 찍는 등, 이제까지 사진이 걸어왔던 한가지 방향(흑백)보다 훨씬 더 많은 가능성들이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70년대에는 흑백을 사용하는 작가도 있고 (Larry Clack 은
히피문화, 마약, 동성애, 등 당시 여러가지 미국의 현실을 흑백으로 표현) 칼라를 쓰는 사진작가가 공존하며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것,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맞는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등의 표현방식이 다양화 되었다.
32
1990~ 현대
45. Barbara Kruger, We will not
ply nature to your culture (우리
는 당신들의 문화에 대해 자연의 역할
을 하지 않겠다), photomomtage.
1983
46. Nan Goldin, Gotscho kissing
gilles, Paris, 1993
사진은 그 후로 어떤 메세지를 담은 문화적 코드나 이슈로서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 속에 사회적으로 유효한 어떤 기능들을 하게 된다. 텍스트
의 관계가 여러 매체들을 통해 시도되는 동시에 성차별, 성소수자들의 정체성, 인종문제, 민족갈등과 같은 사회적이고 정치 문화적인 이슈들이
제기되는데, 사진은 그러한 표현방식에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사진은 사람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서 그
들의 내밀한 삶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그 속에서 어떤 메세지를 던지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을 직접적인 방식이 아닌 간접적인 방식으로 보여
주고 암시하는 것에 사진이 가진 고요하고 절제된 박력이 존재한다.
낸 골딘이라는 여성작가가 찍은 에이즈에 걸린 친구의 마지막순간은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 이상의 것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여짐에 대한 강요가 아닌 사진의 관조적 태도에 있다. 윤리성의 문제 (37p 참조)
33
1990~ 현대
47. Nina Katchadourian, "Mended Spider Web #14 (Spoon Patch)", 1998
48. Erwin Wurm, One Minute Scupltures, 1999~
사진은 또한 현대미술 속에 아카이브, 기록으로서 중요한 역할 하게 된다. 예를 들어 1분 조각으로 유명한 작
가인 어윈브룸은 영구성이 매체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조각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아슬아슬
하게 그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을 포착하여 사진만이 할 수 있는 작품영역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47
34
사진이론의 구체화 "사진이란 무엇인가"
초창기 사진의 역사는 사진을 예술의 제도권 안으로 들여오려는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수 예술로서의 사진 정체성의 주장은 앙드레 바쟁(André
Bazin)과 존 쟈코스키(John Szarkowski), 그리고 넓게는 클레멘트 그린버그까지 포함할 수 있다. 특히 쟈코스키는 사진이 갖는 고유의 시각을 확보하고, 그 예술성을 부
각 시키고자 한다. 60년에 그가 기획한 사진전 다수는 사진예술의 정체성 확보에 커다란 기여를 한다. 순수사진의 주창자로서 쟈코스키는 뉴욕 현미술관(MoMA)에서 사
진디렉터로 재직하면서 1980년까지 사진을 고급미술로 끌어 올렸다. 사진이 다른 매체와 구별되게 갖는 속성을 규명하려는 그의 노력은 모더니스트 회화에서의 그린버그
와 비교된다. 그들은 각각 사진과 회화의 형식주의를 대표한다.
그린버그의 경우는 40년에서 60년 모더니즘 미술사를 정립한 공로와 더불어 1964년 「네 점의 사진들 Four Photographies」이라는 논문에서 특히 앗제와 에반
스의 작품에 대해 극찬하다. 그는 이 사진들이 다큐멘터리를 넘어서고, 지식 전달 이상의 의미를 갖는 걸작들이라 평한 것이다. 바쟁의 경우는 1967년 출판된「사진 이미
지의 존재론 The Ontology of the Photographic Image」에서 ‘진정한 사실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사진 매체의 객관적 성격을 부각시켰다. 사진 이미지가 대상
그 자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통제하는시/공간적조건에서 자유롭다고 본 것이다.
모더니즘 시기를 거치면서 사진은 점차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구축해 왔다. 더 이상 회화를 쫓으려 하지 않고, 본유적인 매체속성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동
시에 사진은 자체의 예술성도 확고히 해갔다. 회화는 회화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사진은 사진 고유의 특성을 각각 부각시켜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입체주의 등 20
세기를 이끄는 다양한 추상미술에서 그 정체성의 절정을 보았고, 후자는 리얼리즘의 중심으로 그 위상을 공고히 한 것이다. 60년대는 사진에 관한 담론이 가장 활봘하게
이루어졌던 시기였다. 50년이 지났음에도 그 시기에 다뤄졌던 담론 속에는 아직까지도 <현재의 사진이론에> 매우 권위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몇명의 비평/철학자들
이 있다. 사진에 대한 통찰력있는 시선과 섬세하고 날카로운 관점에서 비평했던 작가로 롤랑바르트, 발터벤야민, 수잔손택을 꼽았다.
35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스투디움과 푼크툼"
롤랑바르트의 유작인 <밝은 방>은 발터벤야민, 수잔손택의 사진론과
더불어 사진론의 고전으로 취급을 받고 있다. 바르트는 이 책에서 사
진의 <존재론>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러나 기존의 사진론이 지닌 환
원론적 체계에 이질감을 느끼고, 자신의 독자적인 사진론을 전개한
다. 이때 그는 기존의 현상학을 답습하는 대신 '대범한 현상학'을 전
개한다. 즉, 사진 경험에서의 '감정', '파토스적인 것'의 요소를 가장
중요시하고, '마음의 상처'같은 것으로서 사진을 파고들려고 하는 것
이다. "나는 본다, 나는 느낀다. 고로 나는 께달으며 보며 생각한다."
바르트의 현상학은,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소박한 태도에서 비롯된
다. 그는 '쾌락','시랑','죽음'의 관점에서 사진의 본질에 접근한다.
사진의 현상을 본격적으로 밀고 나가는데 있어서 도입되는 것이 라틴
어의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라는 사진경험에 대한 대립적 개념이다.
<스투디움>이란 간단하게 정의하면 사회적으로 코드화된 요소이다. 우리는 다양한 사진에 '관심'을 품고, 그것들을 어떤표현으로서, 역사적 장면으로서 혹은 의식을 채우는 것으로
서 수용한다. 때로 그것들로부터 강한 감동으로 채워진 관심을 낳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사회적코드를 매개로 하며, 훈련이나 교육에 의해 익숙해진 것이다>. 이 차원에 끌리는
것은 비유하자면 영어의 Like정도의 차원에 속한다.
다른 한편으로 Love 개념에 속하는 <푼크툼>은 코드화 되지 않는 요소이며, 그것 자체는 명명/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사진이 원래 정보로 전달되고 공유되고 해독될 수 있는 것이
가능한 것은 거기에 스투디움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지만, 우리에게 사진을 보는 경험이란 그것만이 아니다. 보는 자를 콕콕 찌르고, <가슴을 죄어오는>우발적인 경험, <한 순간 균
열을 내버리는 사진 경험>도 있다. 그 요소가 푼크툼이다. 바르트는 Punctum이라는 라틴어에 포함된 '찔린상처', '작은구멍', '작은 반점', '작은 금'과 같은 의미가 이 경험에 적합하
다고 보았다. 바르트는 불만을 품은 기존의 사진의 논의가 거의 스투디움 ((사회 문화적))해석, 해독)에 해당되며, 따라서 그의 사진론은 푼크툼에 무게를 두고 기술된다. 왜냐하면 바
르트 식의 사진 현상학에서는 푼크툼이라는 경험에 의해서, 보는자가 '자극을 받는것' 에 '사진의 존재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36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사진의 "아우라"의 상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은 예술이 원초적으로 기반했던 제
의적 가치를 더 이상 필요없도록 만든다.(사진은 대량의 인화가 가능
하다. 여기서 어느 것이 진짜 인화냐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예술
의 생산에서 진품성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그 효력을 잃는 순간, 예술
의 사회적 기능은 변화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이제 예술은 제의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
"예술 생산은 주술에 사용되는 형상물에서 시작하였다. 이때 형상물
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유일하게 중요하였다. 그러나 예술작
품을 기술적으로 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겨나면서 예술작품의 전시
가능성이 커졌다. 이제 예술은 제의적 가치보다는 전시적 가치를 추
구하게 된다. 제의적(주술적) 예술의 경향은 일회성(궁극성)에 있으
며, 전시적 예술의 경향은 반복성 (실험, 새로운 배치)에 있다. 이 반
복성의 기원은 유희에 토대를 둔다."
" 우리는 클로즈업을 통하여 불분명하게 보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혀 새로운 물질의 구조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고속촬영을
통해 이미 알려져 있는 움직임의 모티프들만 드러나는 것은 육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임이 분명하다. 다르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의
자리에 무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이 대신 들어선다는 점이다. 카메라는 그것이 지니는 보조수단, 즉 추락과 상승, 중단과 분리, 연장과 단축, 확대와 축소등을 통해 개입한다.
카메라가 사용하는 기법들은 관중의 집단적 지각이 정신병자나 꿈꾸는 자의 개인적 지각 방식을 전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방식들인 것이다."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1977)
37
수잔 손택(Susan Sontag) 사진의 "폭력"
"사진은 우리에게 개로운 시각기호를 가르쳐 줌으로써 무엇을 어떨게 보
아야 하느냐, 또 관찰할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꾸거나
넓혀 주었다. 사진은 하나의 '문법'이다. 더 중요한 것은 '보는 일' 에 대한
윤리라는 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마치 상습적인 관음증 환자처럼 이 세계를 바라
봄으로써 모든 사건의 의미를 대동소이하게 취급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 자체도 사건인데, 그것도 사진을 찍는 사람이 절대
적인 권리를 갖고 일으키는 사건인 것이다." (수잔손택, 1982)
소위 ‘사회문제’를 다루는 예술이 당사자의 삶을 작업의 소재로 소비하
는 현상, ‘이 작업이 과연 그들의 삶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라는 것에 대
한 의문. 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착한 예술’, ‘착한 디자인’이라는
미명 아래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작업을 소재로 사용한다. 그것은 사진
을 처음 접한 학생이 허름한 시장 골목과 상인을 -그 공간과 그 안에서 살
아가는 사람들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향해 누르는 폭력적인 셔터와 다르
지 않다. 그들의 삶이 가진, 낯설기 때문에 매력적인 시각적인 질감이 갤
러리라는 공간에서 전시되고 소비될 때, 그 행위의 동기는 타인의 관심
에 머물 뿐, 작업의 대상에 어떠한 직접적인 영향도 행사하지 못한다.
38
"해독과 해석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진실도 발견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사물,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상형문자의 기호를 해독하는 이집트 학자가 아닌 배움의 견습생은 없다.
한 측면에서 기호로서 그것은 생산적인 비대칭을 표현하고, 다른 측면에서는 그 비대칭을 소멸시키려고 한다. 기호는 어떤 내적인 차이를 함축하면서 상징의
질서를 예비한다. 우리에게 세계가 나타나는 방식 속에 있는 질적차이, 예술이 없었다면 각자의 영원한 비밀로 남아 있었을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질 들뢰즈 , 프루스트와 기호들, 1987)
사진은 그 본질상 글쓰기와 담론과 같은 다른 부차적인 언어적 메세지들을 통해 설명되는 수동적인 입장에 처하게 된다. 사진의 의미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는
곳은 말과 언어적 표현에 있지만, 사진의 기호들은 바르트가 명명한 푼크툼과 같이 개인의 은밀하고 내밀한 마음에 일렁이는 역동 속에서 아주 세밀한 요소들에 의해
재-정립되고 재-창조되는 것이다. 찔림과 관통, 바로 이러한 현상 속에 사진이 갖는 능동성이 있다. 들뢰즈가 지적한 대로 세계가 개인들 각자의 방식으로 드러나게 되는
질적 차이, 그것을 단적으로 내포하는 매체가 사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사진의 정체성은 내부에서 노출되버린, 망각 속에서 건져진 소외된 기억이다.
예를 들어, 브레송과 아베돈의 포트레이트 (특히 브레송이 찍은 유명인사들의 인물사진)의 몽타주적 배치,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리고 한 화면 안에서 다층
레이어드적으로) 의미와 상징의 연쇄 반응을 다중적으로 구성해 내는 것에 대해. 사진이 회화의 부속이나 아류로서 치부될 것이 아닌, 사진 그 자체만이 창출할 수 있는
시각 알레고리가 현실과 어떤 관계 구도를 맺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진은 단지 재현 (Representation) 을 위한 부차적인 수단으로만 보거나 눈
앞의 현실을 기계적으로 찍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간과하고 미처 몰랐던 잠재적 현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은 비가시적인 것을
구체화시키는 가시적 표현 (Expression)으로서 말이다.
우리가 실존을 하다가 소멸을 맞이하는 것이 자명한 이 인간 세계를 이질적인 시선으로, 비유컨대 평상시와는 전혀 다른 초점의 안경렌즈로 들여다 보게 만드는
것이다. 사진은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 매우 진실한 모습으로 암시하고 있는 유일한 예술적 매체이다. <왜 눈 앞에 엄연히 현전하고 있으면서도 현존하지 않는
그 부재감을 더욱 자극하는가?> 라는 의문이 틈 사이로 들어오고, 현실세계의 <단순히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의 토대를 뒤흔드는 것이다. 상실된 것이 표출되면
(*패러독스적이다; 구멍이 뚫려서 그 텅빔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 같은) 그 특유의 걷잡을 수 없이 불분명하게 덮쳐오는 일종의 우수가 있다.
사진에 관하여 & 연구(작업)방향
39
말도 안되게 동떨어진 실질적 <거리감>과 말도 안되게 밀착하고 있는 듯한 <가까움>이 동시다발적으로 우리의 의식 속으로 쳐들어올때 느껴지는 간극, 사진 배경
뒤로 흘러 들어 오는 저편의 공기, 사운드, 냄새., 현전하는 것이 오히려 부재감을 더욱 고통스럽게 인식하게 만들고, 아득한 거리감을 기계적으로 단축시키며 실황으로
닥쳐오는 목소리는, 우리가 도저히 막을 수 없고, 영원히 곁에 둘 수 없는 사랑하는 대상의 존재와 그 죽음 이후의 공허와 부재를 예고해주기 때문이다. 사진의 역사는
흘러가는 사물과 대상을 우리들의 삶 속에 밀착시키려는 노력으로 진전되어 왔건만 우리는 그 속에서 사진만이 가진 역능을 발견하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나에게 깊은 감동과 영향을 주는 몇 명의 고전 예술가들이 있다. 그들 중 사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서 사진에 관한 역사를 테마로 선정하는
데 결정적인 동기부여를 한, 헝가리 출신의 사진작가 앙드레 케르테츠와 스웨덴 영화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이다. 리서치를 연구해 나가면서 이들의 구성력과 작품성은
사진의 모더니즘 시기와 매우 맞물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진은 나에게 매체로서 갖는 두가지 양명성이 존재한다. 하나는 사진 본연의 시각적 예술성이 그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진을 일종의 하나의 도구와 연장, 종이와도 같이 취급하는 응용미술인데, 옳고 그름과 우열의 문제는 아니지만, 전자가 갖는 압도적인 진공상태, 더할
나위없이 명백하고 진실한 하나의 사실로서, 사진이 갖게 되는 진실성과 솔직함, 어찌보면 다소 강압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한편으론
연약함(기교나 변명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은, 다른 매체들이 흉내낼 수 없는 사진만이 가진 고유한 영역이자 존중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시대가 흐르고
바뀌면서 이것을 다루는 방법과 기술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현재 한국은 <사진>에 관한 연구가 서양에 비해 그렇게 활성화 되어 있지 않은게 사실이다. 다소 제한된 자료와 몇명의 서양 비평가들에게서 그 흔적을
찾는데에 그치지 않고 좀 더 전문화된 교육기관이 필요할 것 같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작업에서 갖는 사진의 영향력은 굉장히 커질 것 같다. 특히 영상과 영화에 대한 관심은 사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각각의 프레임들이
서로 충돌하고 만나는 과정에서 생성되어 가는 새로운 의미와 메세지들은 마치 사진과 영상이 재생되는 사각형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고정된 딱딱해진 현실의 모습에
충격을 혼란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인식의 재구성이라고 해야할까. 사진과 영상을 통해서 내가 지향하는 바는 고정 불변한 어떤 사실성, 불변의 진리, 혹은 뿌리 깊게
정착되어온 허구적 인습, 관념들에 대한 재고이다. (그것을 변화시키는 물리적 힘은 부차적이고 이차적인 파급효과이다) 사진은 이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여러가지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어떠한 작업을 하든 그것의 시작점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내부(에 대한 관심)에 있을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유발되는 파급효과(결과)는 (내
손을 떠나) 삶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른 것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40
R E F E R E N C E
뉴홀, B. (2003). 사진의 역사(정진국옮김). 서울:열화당. (원서출판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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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역사

  • 1. 1 O N T O L O G Y T H R O U G H O U T T H E H I S T O R Y 역 사 를 통 한 사 진 의 존 재 론 적 고 찰 P H O T O G R A P H Y
  • 2. 2 4~15c 카메라 옵스큐라의 기원 목 차 1807 볼라스톤의 카메라 루시다 1814 조셉 니엡스의 헬리오그래피 1830 다게레오 타입 & 칼로타입(탈보타입) 1 9 0 0 Kodak Camera 1840 ~1890 사실주의 & 회화주의 (픽토리얼리즘) 1 9 0 2 The Photo Secession ( 미 국 ) 1920 다다이즘 / 초현실주의 / 아방가르드 (유럽) 1960~ 1980 팝아트 / 퍼포먼스/ 개념미술 사진이론 구체화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에 대하여 & 연구(작업)방향 1990~ 현대
  • 3. 3 4~15c 카메라 옵스큐라의 기원 카메라 옵스큐라의 기원은 무려 2천 년 전의 중국과 고대 이집트, 인도 혹은 폼페이 유적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렌즈 형태로 된 유리조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카메라 옵스큐라와 관련된 단편적인 역사적자료들을 통해 우리는 서양 과 동양에서 당시 사람들이 빛에 대한 광학현상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역사적 진술을 다만 추측에 불과할 뿐이며 현재까지 인정되는 카메라의 역사, 즉 카메라 옵스큐 라의 역사는 오로지 기록에 의해 확인되는 것만 인정된다. 문헌으로 암시된 가장 오래된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는 아 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 이 이론으로부터 영감 받은 11세기 아라비아의 알하젠의 언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알하젠은 이러한 빛의 원리를 태양이 부분일식에서 발견하고 있다. " 부분일식이 시작되어 빛이 둥글고 작은 구멍을 통해 평평한 면에 투사되면 태양은 초승달로 나타난다. 이 러한 경우는 빝이 통과하는 구멍이 아주 작은 경우에서만 가능하다." 아라비아 학자들은 당시 연금술과 광학에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이 언급한 것은 단지 자연 현상일 뿐 결 코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에 대한 설명을 아니었다. 후에 13세기 프란체스코 수사인 로저 베이컨이 적은 글 속에서 작은 도표와 함께 다시 태양의 일식에 대해서 설명하게 되는데 당시에는 아무도 그것이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로저 베이컨은 빛 전달의 법칙을 연구하면서 1267년 자신의 글에 구멍을 지나는 태양 빛 파장들이 서로 교차되어 벽면에 투사되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준다. 즉 빛은 어떤 좁은 구멍을 관통할 때 언제나 둥근 자국 형태로 투사되고 구멍의 모양에 상관없이 구멍이 클수록 태양의 자국은 점점 커진다. 1. 로저 베이컨의 다양한 스펙트럼, 1267 Sol Foramen Paries
  • 4. 4 e d c b a n omr p q t k i h g f s 2.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카메라 옵스큐라 원리, 1519년 이전 4~15c 카메라 옵스큐라의 기원 하지만 카메라 옵스큐라가 13세기 베이컨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사실상 카메 라 옵스큐라의 <구체적인 설명>자체는 당시 그들의 기록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문헌에 기록된 카메라 옵스큐라의 구체적인 진술은 중세의 어두운 암흑기인 14-15세기를 지나 새로운 빛의 시대가 도래하는 16세기 때부터 나온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16세기에 만들 어져 17세기에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원리의 최초의 진술자는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 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다. 그러나 그의 진술은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진다. 그가 생전에 남긴 방대한 양의 노트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 밝은 대상들의 이미지가 어두운 방의 작은 구멍으로 들어갈 때, 이미지는 방안에서 구멍 과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하얀 종이 위에 나타난다. 거기서 색깔과 형태를 가진 모든 대상들을 분 명히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들은 크기가 작아지면서 빛파장의 구획을 근거로 거꾸로 역전되어 나타난다. 이때 태양 빛을 받은 부분으로부터 온 이미지는 얇은 투명한 종이 위에 채색화처럼 나타난다. 이럴 경우 구멍은 철판에 아주 작게 뚫어져야 한다." 다빈치의 기록에서 보여진 도식은 일식과 같은 자연 현상을 설명한 경우와는 달리 정확히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현재 기록으로 남아있는 자료 로서는 다빈치가 최초의 진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초의 발명자라고 단언하기에 는 많은 것들이 아직 불확실한 상태로 과거에 묻혀 있다는 게 현재의 통설이다.
  • 5. 5 4. 아타나시우스 키르케의 이동용 카메라 옵스큐라, 16463. 샤이너의 천문 관찰용 카메라 옵스큐라, 1612 4~15c 카메라 옵스큐라의 기원 카메라 옵스큐라는 16세기에 이미 어두운 방, 렌즈, 거울, 조리개 등 오늘날 카메라의 기본이 되는 근본적인 구조와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형태는 17세기를 지나면서 보다 작고, 보다 편리하고, 보다 신속히 이동할 수 있는 모양으로 바뀌었을 뿐 거의 변하지 않았다. 16세기의 카메라 옵스튜라는 알다시피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실제 방>이었 기 때문에 사실상 사용하기가 아주 불편했다. 그리하여 17세기 초부터 이러한 불편을 해결하려는 시도로서 움직일 수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가 여러 가지 형태로 고안되어 등 장하게 된다. 그 과도기적 시기 중에서도 오늘날 잘 알려져 있는 거울이 달린 이동식 카메라 옵스큐라에 가장 근접한 형태로 키르케가 만든 커다랗고 밀폐된 상자와 샤이너가 고안해낸 천문학을 위한 관찰용 기구로서 기다란 대롱이 달린 장치였다. 17세기 중엽부터 점진적으로 학자들은 이 장치의 발전 가능성과 유용성을 인지하면서 실질적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카메라 옵스큐라 만들기에 착수하였다. 그리 하여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러서 카메라는 두 개의 상자를 잇대어 한 끝에는 렌즈를, 다른 한 끝에는 광택을 없앤 종이나 젖빛 유리를 끼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카메라 바깥 쪽에서 렌즈를 통해 이 젖빛 유리판에 맺힌 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 6. 6 6.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사물의 윤곽을 따라 드로잉하는 모습5. 카메라 루시다를 이용하여 소묘하는 모습 보다 더 완벽하게 개량된 형태는 현대적인 반사경식 카메라를 닮은 것으로서, 상자의 윗부분에 젖빛 유리가 씌워졌고 그 밑에 사십오 도 각도로 장치된 거울의 반사로 유리 위에 상이 비취었다. 이 카메라는 상의 위 아래가 거꾸로 뒤집히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었으므로, 젖빛 유리 위에 얇은 동이를 얹어 그 상을 따라 그려낼 수 있었다. 6 중산계층은 초상화를 원했다. 오랜 예술적 훈련을 거치지 않고서도 그러한 요구를 들어 주게 될 기술적 장치들이 속속 연구, 개발되었다. 그럼으로써, 비록 예술가는 못 될망 정 누구나 화공의 솜씨에 비할 만한 그림을 제작할 수 있었다. 이때 등장한 '실루엣 그림'은, 단지 그림자의 윤곽을 따라 그릴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되었다. 1786년 질-루이 크레 티앙 (Gilles-Louis Chretien)이 '자동 전자식 초상 제작기'를 발명하면서, 초보자라도 누구나 동판 위에 음각 미세초상화(미니어쳐)를 제작하여 그 그림들을 복제, 인쇄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영국 과학자 윌리엄 하이드 울러스턴(William Hyde Wollanston)은 이보다 더욱 세련된 예술적 솜씨를 보이게 될 기술적 장치를 고안하게 되는게 이것이 바로 1807년에 소개된 '카메라 루시다'이다.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라는 뜻의 카메라 옵스큐라와 반대로 ‘밝은 방’이라는 의미인 카메라 루시다는 조절 가능한 스텐드에 네 개의 프리즘 을 장착한 것으로 사용자는 프리즘을 통해 대상의 이미지를 화면위에서 보면서 그려낼 수 있었다.5 하지만 카메라 루시다는 여전히 프리즘을 통해 투영된 이미지를 손으로 베낀다 는 점에서 드로잉의 방법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대상의 정확한 묘사라는 드로잉의 목표에 있어서 그 정확도를 보장할 수는 없었다. 손으로 하는 드로잉의 한계를 넘어 보다 정확한 대상의 이미지를 얻고자 하는 화가들의 열망은, 이후의 많은 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더 발전된 이미지 전사방법을 고안하게 하는 동기를 제공한다.
  • 7. 7 7. Camera Lucida in original Shagreen case by Dolland, 1820, London 1807 울러스턴의 카메라 루시다 편명하게 놓은 종이 위에 놋쇠로 만든 가늠자가 세워져 있고, 이 가늠자 위에 유리 프리 즘이 눈높이로 걸려 있으며, 사용자는 프리즘 모서리에 중심이 맞춰진 작은 구멍을 통해 모델과 종이를 동시에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연필로 실제 이미지를 종이 위에서 따라 그려 갈 수 있었다. 단지 그 이름과 기능에 있어서만 카메라 옵스큐라와 유사했던 카메라 루시다는 이동이 간편했기 때문에 여행자들에게 널리 애용되었다. 하지만 여전 히 소묘하는데 있어 근소하나마 스케치하는 작업자에게 숙련된 솜씨를 요구했다. 이 때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카메라 옵스큐라와 카메라 루시다라는 물리적 장치의 도움으로 자연을 보다 더 정확하게 모사할 수 있게 되었고, 사실성에 대한 갈증이 전 보 다 더 충족되자, 사람들은 이제 사실과 모사의 간극을 사람의 손에 쥐어진 연필로 좁힌 다는 것에 더욱 갑갑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직 자연이라는 연필만이 사실을 있는 그대 로 그려낼 수 있었으니, 사람들은 점점 자연스럽게 <손으로 그리지 않고서도 빛 스스로 가 카메라 속에 맺힌 상을 그리도록> 해야 한다는 동일한 이상들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러한 기계를 발명하기 위한 연구들이 적극적으로 시도되기 시작했다.
  • 8. 8 1814 조셉 니엡스의 헬리오그래피 8. "Camera obscura" of Nièpce with installed equipments as first photo-camera (box-camera) about 1825. 석판인쇄술의 새로운 공정에 관심을 갖고 있던 니엡스는 이를 이용해 카메라 옵스큐라로부터 자연의 모습을 복사하려고 여러번 시도한 끝에 1820년 초에 빛을 쐬면 굳어지는 일종의 아스팔트인 주데아 비투멘을 이용하여 그 혼합물로 감광지를 만들었다. 그것을 옵스큐라 속에 넣고 창가로 가서 그의 안뜰을 향해 8시간동안 노출하여 최초의 사진이 만들어진다. 그는 아직 빛에 노출되지 않은 그러나 빛에 민감한 부분을 제거함으로써 이미지를 영원히 고정시키는데 성공한다. 이것을 헬리오그라프(heliopraph, 그리스어로 헬리오는 '태양'을, 그라포스는 '그림그리기'라는 뜻을 나타낸다)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지의 질은 만족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니엡스의 작업은 다게르에게 전해지고 당시 디오라마(diorama : 특수조명과 대형의 투명그림을 이용해 환상적인 효과로 경치를 재현함)로 장관을 묘사하는데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하고 있던 그는 이미지 보존을 위한 니엡스의 시도에 흥미를 가지고 1829년부터 니엡스와 공동연구를 시작한다. 19세기 중반은 사진과 같은 발명품의 성숙기였다. 서양에서는 그 당시 부를 축적하여 새롭게 상승된 부르조아지가 사진을 갖기를 원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이제까지 오직 특별한 사람들만 가질 수 있었던 가족사진을 원했다. 또한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여건이 허락되면 여행을 하여 멀리 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여행 안내서나 사진을 구입하였다. 니엡스는 그 이후로 사진이 사회에 주게 될 큰 충격을 볼때까지 살지 못했다.
  • 9. 9 10. 니세포르 니엡스 <식탁> 1827년경. 엘리오그라프. 소실. 다반과 모리스의 뷔케의 도록 「1900년 만 국박람회의 사진회고전시장」(파리,1903)에서 9. 니세포르 니엡스 <르 그라의 집 창에서 내다본 조망> 1827년경. 엘리오그라프. 게른 샤임 소장품. 텍사스 대학 인문학연구소, 오스틴. 니엡스의 여러 시도들 중 성공적이었던 최초의 사진은 샬롱-쉬르-손 근방의 생 루 드 바렌마을에 있는 그의 저태 '르 그라'의 위층 창에서 잡은 실경으로,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사진이다. 노출은 대략 여덟 시간 가까이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동안 태양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해 가면서 건물의 양편을 모두 비추었고, 따라서 건물의 입체감은 잘 나타나 있지 않다. 또한 이미지는 마치 거 울 속에서처럼 왼편과 오름편의 자리가 뒤바뀌어 있다. 이보다 한층 더 성공적인 유리감광판 위의 그림-음식을 차려놓은 식탁의 모습-을 니엡스 가족의 한 사람이 1890년 프랑스 사진협회에 제출했다. 소재로 쓰인 물건들-병, 칼, 스푼, 주발과 양 념통, 포도주잔, 빵 한조각-은 하이라이트와 중간 톤, 그리고 형태를 감싸고 있는 그늘로 인해 뚜렷이 구별되어 보인다. 이 이미지는 협회의 연감에 수록된 도판으로만 남아 있는데 다소 거친 중간 톤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의 유리 원판은 혐회에 소장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수수께끼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정물이 제작된 날짜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 10. 10 1830 다게레오 타입 & 칼로타입(탈보타입) 1827년 니엡스가 병중에 있던 형을 방문하러 런던으로 가는 여행 도중 파리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화가였던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를 방문하게 된다. 다게르 또한 '빛의 자연발생적 작용'에 의해 카메라의 상을 잡아 보여고 연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무대장치가로서 오페라와 대중 연극을 위한 무대장치를 그리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인물이었고, 따라서 회화적 장치를 제작하는 가운데, 원근법에 정확하게 들어맞도록 하기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를 빈번히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장치들과 친숙했던 탓에 다게르가 사진에 관한 니엡스의 실험에 끌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들의 관계는 지속되어 갔고 1829년 12월 4일, 니엡스와 다 게르는 향후 십년에 걸친 동업 계약에 서명하게 된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사년 뒤에 니엡스는 세상을 떠나게 되고 다게르는 홀로 일을 진행시켜 나간다. 1837년 다게르는 꽤 성공적인 사진을 만들어 낸다. 여러 학술지와 협회에서 다게르의 발명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에 열렬한 흥미를 보이며 다게레오 타입은 인기를 누리게 됬지만 곧이어 한계점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한가지 이유는 이 사진술이 우선 초상화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게르의 은판 사진술은 초기에는 주로 건축물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노출시간으로는 사람들을 촬영할 수 없었고 초기의 혁명적인 발명에도 불구하고 다게르는 자신의 발명을 더 이상 보완하지 못해 좌절한다. 그는 초상사진으로서의 기술적 진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다시 옛날로 돌아가 화가의 붓을 잡고 무대장치를 그리며 1851년에 생을 마감한다. 그 후 다게레오타입의 기술적 진보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독일의 페터 프리드리히 포크틀렌더가 오늘날 f/3.6에 해당되는 개량렌즈를 고안해냄으로 기존의 렌즈보다 스물두 배나 더 밝은 이미지를 얻는데 기여했고, 영국의 좀 프레드릭 고더드가 옥소 대신 할로겐으로 옥화/표면처리한 감광판을 제작함으로써 빛에 대한 감광도가 증가되고 그러한 '촉성재'의 사용으로 평균 일 분 이내에 초상사진을 활영하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해 진 것이다. 또한 프랑스인 이폴리트 루이 피조가 감광판을 도금함으 로써 다게레오타입의 명암이 풍부해졌다. 초상사진관들은 서구의 전 지역에서 개장되기에 이르렀고 1855년 6월 초까지만 하더라도 한해 동안 무려 603,626점의 다게레오타입들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 앉을 수 있었고 제작비가 저렴해졌으므로 경제적 신분의 차이가 문제될 리도 없었다. 11. 다게레오 타입,1841
  • 11. 11 12.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 <정물> 1837. 다게레오 타입. 프랑스 사진협회, 파리. 석고상들, 고리버들로 감싸인 병,그림틀, 그리고 천이 드리워진 정물사진. 이 깜짝 놀랄 만한 그림 에는 세부가 충실히 살아 있고, 하이라이트와 그 림자 사이에 밝기의 점진적 차이가 고르게 나타나 있으며, 재질감과 윤곽, 양감 그 모두가 실감나게 드러나 있다. 다게르가 다게레오 타입이라 불렀던 것들 가운데 가장 초기의 본보기인 이 사진 이미 지는, 그림 제작에 혁명을 일으켰던 새로운 그래 픽 매체의 잠재력을 대변한다.
  • 12. 12 1830 다게레오 타입 & 칼로타입(탈보타입) 다게레오 타입과 비슷한 시기, 1841년 영국인 폭스 탤벗 (William Henry Fox Talbot)이 종이음화 (오늘날의 네거티브)를 사용하는 방법을 통해 고안해 낸 카메라를 칼 로타입, 혹은 후에 칼로타입의 발명자 탤벗의 이름을 따서 탈보타입이라고 부르는 카메라를 고안해 낸다. 요오드화은을 종이섬유 사이에 침투시켜 갈륨산(gallic acid)을 사용해서 현상하는 방법으로 다게르의 발명인 은판사진(다게레오타입)은 좌우역상의 한장의 사진밖에 만들 수 없지만 이 칼로타입은 완성된 종이음화를 다시 복사해서 몇 장이라도 종이양화사진을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네거티브에서 포지티브를 얻는 현대적 사진의 공정을 최초로 사용한 사진술로 다게레오 타입보다는 칼로 타입이 현재에 사용하고 있는 사진의 성질과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탈봇은 다게르의 발명에 관한 소식을 학술지의 회의 보고서를 통해 우연히 접하고 경악하였다고 한다. 영국의 과학자요, 수학자, 식물학자, 언어학자이자 고전학자였 던 그는 다게르의 발명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술을 이미 독자적으로 개발했었기 때문이다. 1835년 자신이 종이음화로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던 그 작업을 서둘러 발표하며 우선권을 선언하고 다게르의 발명공포에 클레임을 제기하였으나 오랜 공방 끝에도 우선권은 인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칼로타입 사진술이 거둔 최초의 예술적 성공은 데이비드 옥타비우스 힐과 로버트 애덤슨이라는 전직 초상화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짧았던 협력기간을 통해 천오백 점 이상의 음화를 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 가장 뛰어난 칼로타입 가운데 하나는 뉴헤이번 근처의 어부들을 있는 그대로 소박하게 찍은 초상들이 있다. 13. Calotype cameras, used by Talbot - 1835 to 1839 그들은 피사체를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았고 음영의 단순한 양감으로 구성했는 데, 이는 그들이 칼로타입이라는 매체의 속성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존중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1848년 힐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화지 전반에 걸쳐 거진 표면과 고르지 못한 질감이, 칼로타입 이 다게레오타입에 비할 떼, 세밀한 곳에 실패를 가져오는 주요 인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칼로타입의 강점이기도 하다. 너무나 완벽한 신의 작품이 아니라, 마치 인간의 손으로 빚어진 미완의 작업 그 자체로 보이는 것이다."
  • 13. 13 14. 윌리엄 헨리 폭스 톨벗 <건초더미> 1843. 칼로타입 음화의 염화은판 사진. 폭스 톨벗 박물관, 영국 하지만 칼로타입이 주로 사용된 분야는 초상사진이 아니라 건축과 풍경의 기록이다. 톨벗이 발명한 칼 로타입은 프랑스로 건너가 그곳에서 특허를 얻긴 했지만 그는 그 권리를 확실하게 주장하진 않았고 그로인해 칼로타입은 프랑스에서 보다 널리 사용되 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인들에 의해 칼보타입 은 두 종류의 중요한 기술적 개선을 이룩하게 된다. 그 중에 하나는 음화의 재료로 쓰이는 종이를 감광처리하기에 <앞서> 밀랍을 입히는 기법이었는 데, 이것은 노출 과정에서의 부족분이나 과잉을 현 상과정에서 충분히 보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다른 하나는 책과 앨범 등에 사용하기 위한 보 제사진의 대량생산이 그것이다. 루이 데지레 블랑 카르-에브라르가 인화시간을 태양광선 아래에서는 육 초, 그늘에서는 삼십 내지 사십초로 단축시킨 인 화기를 개발해 낸 것이다.이에 따라 하루에 사천 점 씩 인화해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 14. 14 16. 로버트 코넬리어스 <자화상> 1839. 다게레오 타입. 개인소장. 필라델피아15. 샤를 네그르 <노트르담 성당의 앙리 르 세크> 1851. 칼로타입 음화의 염화은 판 사진. 앙드레 잠 소장, 파리 다게레오 타입의 단점 : 감광판 자체가 한장의 사진이므로(복제 불가능) 표면의 취약/ 견고하지 못했던 보관의 난제/ 고가/ 장시간 노출 다게레오 타입에서 사용한 셔터방식: 캡 셔터 칼로타입의 단점 : 종이 네가사용에 따른 인화지 전반에 걸친 표면과 고르지 못한 질감 - 다게레오 타입의 효과에 견주지 못함(화질이 떨어짐) : 미국인들이 다게레오 타입을 더 선호
  • 15. 15 1840 ~1890 사실주의 & 회화주의 (픽토리얼리즘) 17. Peter Henry Emerson. Blackshore, River Blythe, Suffolk from Emerson's illustrated book 'Pictures of East Anglian Life', 1888 18. Henry Peach Robinson. When The Day's Work Is Done. 1877 Combination print (혼합인쇄) made from six different negatives 사진이 등장하고 확산되면서 <사실 그대로의 재현>이라는 사진의 매체적 특성은, 사진이 갖고 있는 장점인 동시에 예술로 받아들여 질 수 없는 한계가 되기 도 했다. 때문에 이 당시에 사람들은 사진을 좀 더 회화처럼, 그림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시도들을 한다. <고무 인화법>이라는 방법은 그러한 시도들 중 하 나로 네거티브필름에 채색과 수정을 하는, 오늘날로 보면 <포토샵작업>과도 같은 개념의 후가공 과정이 행해지기도 했으며 <혼합 인쇄법>이라는 방법으로 2개 이상의 필름을 겹쳐 풍경사진에 사람형상을 넣기도 하는 등의 방법들을 이용하게 된다. 당시 회화에서 성행했던 라파엘전파 미술의 화풍의 영향을 받아 사진들도 그러한 모습으로 제작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사진의 경향성은 회화주의 혹은 픽토리얼리즘이라 불려지며 <Linked Ring Brotherhood> 라는 픽토리얼리즘파 모임단체가 형성되기도 했는데 영국의 헨리 피치 로빈슨(Henry Peach Robinson)과 피터 헨리 에머슨(Peter Henry Emerson)이 대표 적인 픽토리얼리즘 경향의 사진가들이었다. 이 시기에 사진에 대해 행해졌던 방법들은 비록 회화를 그대로 따라 가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점차적으로 <사실을 그대로 재현> 에 내는 기능에서 벗어나 예술적인 시도들을 할 수 있는 매체로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 16. 16 1840 ~1890 사실주의 & 회화주의 (픽토리얼리즘) 사진이 예술가층의 사람들로 부터 회화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예술적 매체로서 시도되었던 것을 픽토리얼리즘이라고 한다면, 또 다른 한편으로 사 진 발명 초기부터 초상사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던 특성 그 자체, 즉 <기록>으로서의 사진, 현실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의 이미지, 사실을 기록하고 남겨두는 것에 충실한 사실 그대로서의 사진이 있다. 이렇게 사진은 두가지 측면의 경향으로 나누어 지기 시작했고 각기 다른 방 법과 모습으로 발전해 갔다. 사실주의 입각한 사진들은 주로 초상사진이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되면서부터 점차 그 특징과 정체성이 드러나게 되 는데, 3,4개의 렌즈를 사용해 한장의 사진에 여러모습들을 담아 내는 초상사진들은 오늘날 명함판사진과도 같은 형식을 통해 발전되어 간다. 사진은 또한 인류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수단으로도 적극 사용되기 시작하는데, 미지의 곳을 탐험하거나 지리적인 실측을 하는 등의 학문적인 영역에서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다. 티모시 오설리반 (Timothy O'sullivan) 은 현상 그대로의 흔적, 방문했던 지역에 대한 모습, 그곳에 거주하는 낯선 원주민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포토그래퍼이다. 20. Andre-Adolphe Eugene Disderi. un-cut carte-de-visite sheet (명함판 사진). 1854 19. Timothy O'sullivan. Native Americans. The Pah-Ute(Paiute) Indian group, near Cedar, Utah in a Picture from 1872
  • 17. 17 1840 ~1890 사실주의 & 회화주의 (픽토리얼리즘)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는 범죄자의 사진 유형의 발단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골턴과 베르티용의 두상사진. 사람의 두상을 측면과 정면에서 찍어 어 떤 통계자료나 연구자료, 혹은 범죄자들을 분류하고 조사하는 수사자료로 사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당시 통계학자이자 경찰국에 근무하기도 했던 베르티용은 사람의 두상을 실측하기도 하고 신체의 여러 부위들을 비교, 분류 하는 등의 인체측정술을 도입하여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고 범인을 검거하는데 최초로 사진을 사용해 상습적인 범죄자들을 분류하는 등의 성과를 낸다. 골턴의 <유태인타입>은 인종차별의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지만, 훗날 베르티용과 골턴의 사진형태는 뒤샹의 예술작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뒤샹은 이러한 유형적 사진에 착안을 해서 자신의 작품에 이용한다. 22. 23. 베르티용(Alphonse Bertillon), Galton. 1893. 인체측정 (anthropometry). 1890's 21. 골턴(Francis Glaton), The Jewish Type. 합성초상 (Composite Portrait). 1877-1896
  • 18. 18 이 시기의 사진의 입지는 상당히 과도기적인 과정을 겪고 있었다. 사진의 등장 이후 점점 대중들 사이에서도 사용의 빈도가 높아짐에따라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 해 그것이 갖는 실재성이란 속성과 예술가적 가치 사이의 끊임없는 경쟁이 이루어 졌다. 즉, 실재성과 예술성 사이의 관계이다. 이 화두는 사진의 초기역사부터 논 의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사실과 객관에 근거한 이러한 사진의 속성이 비-예술적요소 였음이 분명하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실재의 모사라는 사진의 속성이 예술성의 차원에서 부정적 가치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뒤봐(Philippe Dubois)는 사진이 처음 등장했던 당시 의 주도적 반응을 이렇게 정리했다. "손을 거치지 않은 이미지는 예술가의 땀과 영감, 그리고 손재주의 생산물인 예술작품과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사진이 출현된 당시 사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표방한 적대적 비평가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사진을 예술적 상상을 파괴하고자 협박하는 반-예술이라 여겼던 것이다. 혹은 사진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되, 회화의 부속물로 여기는 관점들도 있었다. 텐느(Hippolyte Taine)는 사진을 대상의 형태를 실수 없이 탁월하게 모사하 는 예술로 인식했다. 그러나 그가 '예술’이라고 언급했을지라도 사진을 예술로 본 것은 아니었고 <회화 예술에 유용한 하나의 도구>로서 여겼을 뿐이었다. 그는 궁 극적으로 사진은 절대로 그림과 비교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사진 반론자 중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혹독했던 사람은 프랑스 <낭만주의>시인 샤 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였다. 1859년 미술 살롱전과 관련된 글에서 그는 사진이 <미술의 아주 소박한 시녀>라는 극단적 발언을 했다. 그는 사진의 사 실성과 복제성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이는 그의 사실주의에 대한 공격과 일맥상통한다. 그것은 '역사' 혹은 '픽션'이라는점이다. 그는 여기서 소설이 역사보다 훨씬 더 ‘진실할’ 수 있듯이, 회화적이고 상상적인 초상화가 자세한 드로잉보다 모델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카메라가 여러 분야의 학자들에 의해 기술적 진보를 거듭해 가며 실제 대상들을 똑같이 구현해 내는데 발전을 거듭해 갈 수록 회화가 사 물을 그로 재현해내야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 나는 데에 사진이 일조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진이 회화에게 표현상의 해방을 촉진시켰다는 뜻이다. 특히, 입체 주의와 추상미술의 탄생에 사진의 기여를 절 빼놓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진보적' 화가들은 사진을 '해방'으로 여겼다. 사진은 재현적 회화를 제작해야 하는 필요 와 부담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반대의 양상에서 전개된 것이 바로 회화주의(pictorialism)이고, 실재의 모방에 반하여 사진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이 움직임은 사진의 예술성을 부각시 키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는 19세기 사진사에서 객관적 사실구현이라는 사진의 일차적 기능에 대하여 자체의 부정적 인식을 반영한다. 1880년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번성했던 회화주의의 본질적 의도는 사진을 고급예술(high art)의 면모와 용도를 갖추게 하려는 것이었다. 1840 ~1890 사실주의 & 회화주의 (픽토리얼리즘)
  • 19. 19 1 9 0 0 Kodak Camera 카메라는 이제 손 안에 쥐어질 만한 부피로 축소 되었다. 사진가들은 삼각대를 갖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종류의 휴대용 카메라들이 시장 에 진을 쳤다. 판매 중인 이 엄청난 핸드 카메라를 선택하려고 로빈슨이라는 사람은 제비뽑기를 하기도 했다. "작은 종이에 나누어 거의 <오백여>종의 핸드 카메라의 이름을 쓰고는, 모자에 집어넣고 어린애한테 그 중 하나를 꺼내도록 해서 그것을 구입했습니다. 참 다행스런 묘안이었지요. 똑같은 거을 사기 위해 거의 천가지에 달 하는 방법으로 따져 본다는 곤혹스럽고 고약한 일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로빈슨이 쓴 글에서 우리는 당시 카메라를 고르는일이 <곤혹스럽고 고약한 일>로 여겨질만 큼 그 종류가 엄청났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카메라들 가운데에서 가장 잘 기억되는 것이 바로 코닥이다. 뉴욕 로체스터의 건판 제조자인 조지 이스트먼(George Eastman)이 개발하여 상품화시킨 이 카메라는 1888년에 처음 시장에 나왔다. 그가 설명하길 Kodak이라는 상호는 전 세계 어느 언어권의 사람이 읽어도 똑같이 '코닥'이라고 발음할 수 있도록 알파벳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는 또 산업의 제국화 전략에서도 주목받은 작명술이었다. "순전히 임의로 글자를 짜 맞춰 지은 것입니다. 어떤 기존 낱말 전체나 일부를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상표 이름의 제 조건을 고루 갖출 수 있는 단어를 상당히 궁리한 끝에 그렇게 정했습니다. 짧은 단어 여야 한다는 것이 우성적인 원칙이었습니다. 잘못 표기하여 그 정체응 오도하게 될 가능성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신하고 특출한 개성도 있어야 했고, 외국의 다양한 등록상표법에도 맞아야 했습니다." 원래의 코닥은 상자형 카메라였다. 3.25x3.75x6.5인치 크기에, 초점거리는 이십칠 밀리미터, 조리개는 f/9로 기발한 원통형 셔터를 갖고 있었다. 여타의 경쟁 상품과 다른 점은 백장의 음화가 장전될 만큼 긴 두루마리 필름을 사용했고, 각각의 음화들은 직경 2.5인치의 원형인 점이었다. 코닥의 이러한 초창기 카메라 모델은 브라우니(Brownie)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24. A Kodak Box Brownie Camera, 1900
  • 20. 20 1 9 0 0 Kodak Camera 이스트먼의 가장 큰 업적은 카메라 디자인이라기보다는 고객들에게 사진 마무리작업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한 점에 있었다. 카메라는 필름이 내장 되어 판매되었다. 그 가격은 25달러로 현상,인화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 다. 잘 찍힌 음화로부터 밀착 인화한 사진이 금테 두른 초콜릿빛 카드 위 에 깔끔하게 끼워져 구매자에게 되돌려 지는 것이다. 이것은 <브라우니 앨범>이라고 불리며 현재에 우리가 알고있는 사진앨범과도 같은 프레임 에 끼워진 사진들을 모은 한권의 책이었다. 이렇게 코닥은 굉장히 지능적 이고 상업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대중들을 사로잡았고, 코닥의 유명한 슬 로건 <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 당신은 셔터만 눌러 라, 나머지는 우리가 한다, 라는 광고문구는 매우 적확하게 대중들 속으 로 파고들었다. 더이상 전문적 작업실이 불필요해졌고 거추장스런 장비 들과 까다로운 기술로부터 자유로워져, 사람들은 이제 모든 종류의 소재 들, 소풍이나 외출시의 꾸밈 없는 기록들, 멀리 떨어져 있거나 오직 여행 중에만 볼 수 있을 것들과 같이 일상을 촬영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리고 이러한 일상의 매체가 된 사진은 1900년대 초반 1차세계대전 무렵 전장에 나간 아들과 가족 친구들간의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 되기도 했 고, 인간의 삶 속에 중요한 소통의 매개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25. A Kodak Camera advertisement appeared in the first issue of The Photographic Herald and Amateur Sportsman, November, 1889.
  • 21. 21 1 9 0 2 The Photo Secession 사진 분리파 ( 미 국 ) 모든 대중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면서 사진은 또 다른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대중들이 찍어대는 일상의 가벼운 사진과는 다른 차별화된, 하지만 동시에 사진이 회화를 닮으려는 과거의 노력과도 대조를 이루는, 사진의 <순수 형식>, 사진의 예술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생겨나게 된다. 특히 미국에서는 사진의 매체적 속성 자체를 예술성으로 한층 더 끌어 올리려는 노력이 두드러졌다. 진보적 사진작가들에 의해 사진 매체의 고유한 특성을 살린 ‘스트레이트’ 사진이라 불리는 하나의 사진양식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의 슬로건은 ‘형태가 기능을 따른다’ 는 것이었다. 이들은 회화주의 작업에 두드러지는 조작과 인위성을 피하고자 한다. 회화주의 사진작가들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갖고 회화의 표면 텍스쳐를 모방하려 했던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진의 매체적 특성을 그대로 예술로 만드는 순수 사진에 대한 칭송이 커졌다. 이 시기에 사진 언론에는 많은 글이 올라왔는데, 그 중 1904년 미술 비평가 하트만 (Sadakichi Hartmann)은 수작업이 많이 개입된 회화적 작업을 비난하며, 직접적으로 작업 하는 방식을 주창한다. 20세기 초에 새로운 혁신은 스트레이트 사진을 소위 <합법적 미술매체>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사진의 예술성에 관한 논란에 있어, 사진의 독자적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이 움직임에는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가 중심에 있다. 그는 사진의 회화주의 운동과 결별하고, 스트레이트 사진(straight photography), 혹은 순수사진(pure photography)을 사진의 새로운 방향으로 설정한다. 스티글리츠는 1902년 뉴욕에서 사진분리파(Photo- secession)를 구성하고, 1903년에 창간한 공식적인 계간지『카메라 워크』를 통해 사진이 회화에 버금가는 독립적 예술임을 주장한다. 26. Alfred Stieglitz (1864–1946) , The Steerage, 1907.
  • 22. 22 1 9 0 2 The Photo Secession 사진 분리파 ( 미 국 ) 27. Edward Weston, Cabbage Leaf, 1931. 28. Edward Weston. Nude. 1926. 사진 분리파는 글자 그대로, 대중들의 일상사진과 회화주의 사진이 갖는 수동적 기능으로서의 사진에서 <분리> 되자! 는 목적으로 사진의 미학을 점차적으로 고 양시켜 나갔다. 사진의 형태미, 매체의 연구등을 통해 정교하고 섬세하면서도 아름다운 형식들로 발전되어 간다. 분리파를 기점으로 사진의 모더니즘이 전개되던 이 시기는 사진의 형태와 형식, 구성들이 중요시 되었다.
  • 23. 23 1 9 0 2 The Photo Secession 사진 분리파 ( 미 국 ) 29. Paul Strand, Wall Street, New York, 1915 30. Paul Strand. Abstraction, Porch Shadows . 1916 사진 분리파의 구심점이 된 화랑은 뉴욕 5번 가의 ‘291 갤러리’ 이다. 이 계통의 작가들로 스타이켄(Edward Steichen), 에반스(Walker Evans), 웨스톤(Edward Weston), 아담스 (Ansel Adams) 등이있다. 사진 분리파와 291 갤러리의 활동은 1917년에 마무리되었지만, 놀랍도록 직접적이고 심도있는 사진작품은 이 후에도 계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 24. 24 1920년 후반의 이렇듯 증가되는 스트레이트 사진에 대한 인식은 과거에 잊혀졌던 작가의 재발굴을 초래하기도 한다. 사진의 전설적 인물인 유젠 앗제(Jean Eugène Auguste Atget)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가 1898년 이래 찍은 수천 점의 사진 중 단 한 점도 살롱이나 사진 잡지에 공개되지 않았었다. 그의 작업은 사진가들이 아닌, 멜랑콜리한 이미지를 추구했던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서 알려지게 된다. 사진을 형상만을 가지고 두가지의 큰 축으로 나누어 인물과 풍경사진으로 본다면, 훗날 발터 벤야민이 극찬을 했던 사진가들도 당시 유젠 앗제와 아우구스트 잔더라고 하는 풍경과 인물사진가이다. 이들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사람들에게 가장 가깝고 친근한 대상들, 일상의 것들 속에서 사진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아우라를 이끌어 내며 붙잡을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정지되고 얼어 붙은 결정의 순간들을 포착해내고 있다. 간과되거나 아무 의미없이 흩어지는 인간 삶의 숨겨진 기호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붙잡아두고 기록하는 것이다. 31. Eugène Atget, Boulevard de Strasbourg, Corsets, Paris, 1912 32. August Sander Boxers, Paul Röderstein and Hein Hesse, Cologne, 1929
  • 25. 25 같은 시기, 각기 다른 나라들이 서로 맞물려 있는 유럽에서는 미국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사진이 발전되고 있었다. 예술과 디자인에서의 다다이즘, 러시아의 구성주의,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적인 전위적이고 실험주의적인 사조들속에서 사진은 곧바로 예술에 적극 수용되었고 변형, 수정, 재구성되며 미국보다는 좀 더 <물리적>이고 <즉각적인>매체로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그 시초로 만 레이가 있는데, 그는 훗날 팝아트 양식에도 영향을 미친 예술역사의 역동기 속의 핵심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오브제와 사진의 결합, 감광지에 빛을 쏘아서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사진을 찍어내는 (만 레이의 이름을 딴) Rayograph 라고 일컫는 포토그램, 라즐로 모홀리나기의 포토 몽타주 등, 우리가 현재 포토샵으로 흔히 하고 있는 거의 모든 작업스타일이 이 시기에 대거 등장하게 된다. 1920 다다이즘 / 초현실주의 / 아방가르드 (유럽) 33. El Lissitzky, The Constructor, 1924/printed 1985. Based on his self-portrait from 1914. 34. Man Ray, Le Violon d'Ingres, 1924
  • 26. 26 35. Man Ray, Rayograph, 1922 젤라틴 은판 사진. 『매혹적인 들판』(파리, 1922) 에서. 현대미술관, 뉴욕 취리히 다다의 일원인 크리스티안 샤트는 1918년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사진적으로 제작한 추상사진을 만들었다. 톨벗의 최초 사진적 실험으로 돌아가 그 기법을 구사하면서 오려낸 종이나 평면적 오브제들을 감광처리된 종이 위에 올려 놓고 노출시켜, 마치 신문을 오려내거나 접착제로 화폭 위에 이것저것 덧붙여 만든 입체파 콜라주와 거의 같아 보이는 형태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 작업은 만레이와 라즐로 모홀리나기에 의해 한걸음 더 진전되었는데, 전자는 레이요그라프, 후자는 포토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착수되었고, 그들은 감광처리된 종이 위에 입체물을 올려 놓았다. 형태를 이룬 그림자, 또 투명한 오브제일 경우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명백한 자동기술적 효과가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감수성에 어필했다.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제작한 사진> 방식은 현대사진에서도 다시 부활해 몇몇 사진예술가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 27. 27 1920년대 예술가들의 가장 놀라운 기여는 하나의 새로운 시각적 형상을 이루도록 각기 분리되거나 흩어져 있는 그림들을 조합하거나 풀로 붙이는 작업에 있었다. 이 방식은 추상적 구성 속에 주로 신문에서 오려낸 인쇄물을 붙이거나 화폭에 작은 오브제들을 접착시키니는 수법에서 영감을 얻고 있다. 따라서 그 작품들은 콜라주-프랑스어 동사로 콜레(coller), 즉 접착한 다는 뜻에서 파생한-라고 불렸다. 예술적 매체로서의 포토몽타주의 출발은 다다 그룹에서 추적할 수 있다. 천재적 '포토몽타타주 제작가' 존 하트필드의 동생 빌란트 헤르츠펠데는 1920 년 최초의 베를린 다다 전시회 카탈로그에 그 과정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36. 라즐로 모홀리-나기 <질투> 포토몽타주,1927 37. 헤르베르트 베이어 <고독한 도시인>, 1937 "회화는 한때 사물의 외관을 기록해야 한다는,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자 기 눈으로 본다 하더라도 잘 파악할 수 없었던 풍경, 동물, 건물 등의 외관 을 기록해야 한다는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과제는 오늘날 사진과 영화에 넘겨졌고, 이들은 회화가 수행했던 것보다 한층 완벽하게 그러한 목적을 잘 성취하고 있다. 아직까지 이러한 목적의 상실로 인해 회 화가 사멸한 것은 아니며, 다만 새로운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후로 모든 예술적 노력-그 차이점이 얼마나 큰 것이건 간에-은 현실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조류에 편승해 왔다. 다다이즘은 인상주의자와 표현주의자 및 입체파, 그리고 미래파(영화에 양보하기를 원치 않았던)이 면에 원동력이 되어 주었던 사실적인 것을 부정하려는 일체의 시도에 대 한 반동이다. 과거 방대한 양의 애정와 시간과 노력이 회화 속에 어떤 인물과 꽃과 모 자, 그림자 등을 그려 넣는 데 쏟아졌던 반면에, 우리는 단지 가위 한 자루 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회화나 사진으로부터 오려낼 뿐이라고 다 다이스트들은 말한다. 가령 우리에게 작은 크기의 물건이 필요할 경우 그 것을 재현하는 대신 그 오브제 자체, 예를 들어 주머니칼, 재떨이, 책 따위 를 취한다. 낡은 예술의 미술관에는 이렇게 별것 아닌 것들이 아름답게 채 색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그렇더라도 다만 그려져 있을 뿐인 것이다."
  • 28. 28 38. Richard Hamilton. 'Just what is it that makes today's homes so different, so appealing?' ('무엇이 오늘의 우리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 드는가?') 1956 1960~ 1980 팝아트 / 퍼포먼스/ 개념미술 유럽 팝아트의 시작을 알리는 리차드 해밀턴의 대표적인 콜라쥬이다. 예술가 집단들의 활동들이 자신들이 속했던 <예술영역>에서 <사회현상>적 영역으로 확장되어 대중들 속으로 파고 들게 된 아주 중요한 시대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해밀턴은 잡지나 신문등의 대중매체에서 오려낸 조각들을 재료로 콜라쥬로 재구성하여 기존의 이미지가 지니고 있는 의미와는 다른 메세지를 이끌어 냄으로써 대중매체와 소비문화가 현대사회에 미치는 영향력과 왜곡된 진실에 관한 문제들을 담아내려 했다. 이러한 팝아트의 등장이 오늘날 시사하는 점은 바로 사진과 이미지와 같은 예술의 사회적 기능성, 영향에 있다. 과거에 매우 독립적이고 어찌보면 <고립된> 예술가들만의 집단에서 다양한 실험들, 예술을 위한 예술들(Art for Art's sake)을 해왔지만 그들이 이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 세계, 사회, 사람들에 눈을 돌려 관심을 갖고 어떤 실질적이고 의미있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만하고 자아중심적이고 유아론적이었던 예술의 권위적 입지가 상호적이고 관계지향적이고 공생적 관계속으로 (편입이 아닌) 오히려 <확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매우 상징적인 일이었다. "팝아트는 대중적이고, 일시적이며, 소모적이고, 저가다. 대량생산되고, 젊고, 위트가 있으며, 섹시하고, 교모하며, 매력적인 큰 비지니스다. 20세기 도시 생 활을 하는 예술가는 대중문화의 소비자이며 잠재적으로는 대중문화에 대한 기여자일 수 밖에 없다." - Richard Hamilton
  • 29. 29 39. Andy Warhol, Holly Solomon 1963-1964, seven unique gelatin silver, photobooth prints. 40. Keith Arnatt, Self-Burial (Television Interference Project, 1969) 1960~ 1980 팝아트 / 퍼포먼스/ 개념미술 60년대는 사진의 새로운 역사적 변화가 일어났던 분기점이라고들 한다. 50년대까지 회화가 예술의 최고 권위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면, 고급예술, High아트만이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술개념에 대한 전반적인 혁신이 일어났다. Pop Art, 퍼포먼스,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오늘날 우리가 볼 수있는 경향들 대부분은 사실 이 시기에 전부 나오게 된다. 그에 따라 사진의 영역과 외연, 그리고 그 개념과 본질적인 의미조차 다양한 변화들을 겪게 되는데, 물론 과거에서부터 모더니즘 계열의 사진들은 계속해서 발전되어 가고 있었지만 대중매체에서의 잡지나 신문들의 사진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고, 특히 개념미술이나 퍼포먼스 아트와 같이 순간적이거나 일활적으로 행해지는 일들을 기록하는데에도 사진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앤디워홀은 자신의 작업장에 포토부스를 따로 설치해 놓고 일련의 사진들을 셀프로 찍을 수 있도록 하는 오늘날의 <스티커사진>의 시초라고 볼 수도 있을 시도들을 하였는데, 이러한 사진들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반복적 이미지, 배열 등의 특징과도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 하나의 대상을 찍는 데 다른 각도와 시간차를 두고 반복해서 보여주는 이런 특징은 사진이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가 단지 시각적인 효과로만 국한된 것이 아닌, 개념미술에서 볼 수 있는, 예술을 보여주고 표현하는데 있어서 <반복>과<차이>사이의 열려진 틈, <반복>되는 이미지 <속에서> 미세한<차이>들을 발생시키며 그러한 틈새속에서 의미들을 창출해 내는 의미생성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있는것이다. 케이스 아넷의 <자기 무덤파기>라는 퍼포먼스는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도 할수도 있는데, 이 작품은 또한 텔레비젼 인터퍼런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특정 Tv프로그램 상영의 황금시간대에 한장면씩 불시에 몇초씩 끼워넣는 방식으로 기획되어, 대중매체의 상징적 매개물이라고 할 수 있는 TV에까지 현대미술이 스밀수 있는 시도들을 하며 사람들의 삶에 더욱 밀착되어갔고,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아트에 있어서 사진은 기록하고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 30. 30 1960~ 1980 신지형학/유형학 41. Lewis Baltz, The New Industrial Parks from the portfolio 'The New Industrial Parks near Irvine, California, Gelatin Silver Prints, 1974 42. Bernd and Hilla Becher. Gas Tanks, 1983-92 과거 1840-50년대 초기 사실주의 사진에서 모르는곳을 탐험하고 조사하는 인류학적 사진의 경향에서 출발해 발전을 거듭해 90년대 후반 사진에 있어서 어떤 특징적인 하나의 영역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신 지형학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사진 유형들은 사진이 지니고 있는 본질을 살리면서도 실제 사회나 생활속에서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는 독립 적이고 특징적 부류가 된다. 독일의 유형학 사진을 알리게 된 베허 부부의 대표적인 사진들 중에 하나인 <가스탱크>사진은, 독일 지역들의 공장, 산업지대같은 곳의 건설, 변화과 정을 길게는 10년이상의 텀을 두고 제작한 프로젝트성 작품들중 하나로, 오랫동안 관찰하고 기록해 둔 사진들을 배열하고 반복된 이미지들 속 시간의 흐름에 따라 드러나게 되는 각각 개별적인 사진들의 차이, 이것을 통해 어떤 대상들의 유형을 뽑아내는 사진들을 일컬어 유형학이라는 사진의 특정 부류가 탄생하게 된다.
  • 31. 31 1960~ 1980 칼라시진 등장 43. William Eggleston(1939-), Red Ceiling, Greenwood, Mississippi, 1969-71 44. Stephen Shore, Room125, West Bank Motel, Idaho Falls, Idaho, July 18, 1973 사진의 발명이 회화를 재현적인 특성에서 해방시켜 주었던 것처럼, 칼라사진의 등장은 흑백사진이 갖는 모더니즘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벗어나 사진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제 사진가들은 더 이상 흑백의 미묘한 차이, 구도, 각도, 선명도, 프레임에만 천착할 필요가 없었다. 칼라사진은 오늘날의 사진형태에 가장 가깝고도 일상적인 사진들을 훨씬 더 생생 하게 재현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윌리엄 이글스턴과 스티븐 쇼어 (앤디워홀 팩토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던)와 같은 사진작가들은 이러한 칼라사진을 적극 활용하여 자신들 일상 의 면을 찍는 등, 이제까지 사진이 걸어왔던 한가지 방향(흑백)보다 훨씬 더 많은 가능성들이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70년대에는 흑백을 사용하는 작가도 있고 (Larry Clack 은 히피문화, 마약, 동성애, 등 당시 여러가지 미국의 현실을 흑백으로 표현) 칼라를 쓰는 사진작가가 공존하며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것,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맞는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등의 표현방식이 다양화 되었다.
  • 32. 32 1990~ 현대 45. Barbara Kruger, We will not ply nature to your culture (우리 는 당신들의 문화에 대해 자연의 역할 을 하지 않겠다), photomomtage. 1983 46. Nan Goldin, Gotscho kissing gilles, Paris, 1993 사진은 그 후로 어떤 메세지를 담은 문화적 코드나 이슈로서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 속에 사회적으로 유효한 어떤 기능들을 하게 된다. 텍스트 의 관계가 여러 매체들을 통해 시도되는 동시에 성차별, 성소수자들의 정체성, 인종문제, 민족갈등과 같은 사회적이고 정치 문화적인 이슈들이 제기되는데, 사진은 그러한 표현방식에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사진은 사람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서 그 들의 내밀한 삶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그 속에서 어떤 메세지를 던지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을 직접적인 방식이 아닌 간접적인 방식으로 보여 주고 암시하는 것에 사진이 가진 고요하고 절제된 박력이 존재한다. 낸 골딘이라는 여성작가가 찍은 에이즈에 걸린 친구의 마지막순간은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 이상의 것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여짐에 대한 강요가 아닌 사진의 관조적 태도에 있다. 윤리성의 문제 (37p 참조)
  • 33. 33 1990~ 현대 47. Nina Katchadourian, "Mended Spider Web #14 (Spoon Patch)", 1998 48. Erwin Wurm, One Minute Scupltures, 1999~ 사진은 또한 현대미술 속에 아카이브, 기록으로서 중요한 역할 하게 된다. 예를 들어 1분 조각으로 유명한 작 가인 어윈브룸은 영구성이 매체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조각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아슬아슬 하게 그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을 포착하여 사진만이 할 수 있는 작품영역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47
  • 34. 34 사진이론의 구체화 "사진이란 무엇인가" 초창기 사진의 역사는 사진을 예술의 제도권 안으로 들여오려는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수 예술로서의 사진 정체성의 주장은 앙드레 바쟁(André Bazin)과 존 쟈코스키(John Szarkowski), 그리고 넓게는 클레멘트 그린버그까지 포함할 수 있다. 특히 쟈코스키는 사진이 갖는 고유의 시각을 확보하고, 그 예술성을 부 각 시키고자 한다. 60년에 그가 기획한 사진전 다수는 사진예술의 정체성 확보에 커다란 기여를 한다. 순수사진의 주창자로서 쟈코스키는 뉴욕 현미술관(MoMA)에서 사 진디렉터로 재직하면서 1980년까지 사진을 고급미술로 끌어 올렸다. 사진이 다른 매체와 구별되게 갖는 속성을 규명하려는 그의 노력은 모더니스트 회화에서의 그린버그 와 비교된다. 그들은 각각 사진과 회화의 형식주의를 대표한다. 그린버그의 경우는 40년에서 60년 모더니즘 미술사를 정립한 공로와 더불어 1964년 「네 점의 사진들 Four Photographies」이라는 논문에서 특히 앗제와 에반 스의 작품에 대해 극찬하다. 그는 이 사진들이 다큐멘터리를 넘어서고, 지식 전달 이상의 의미를 갖는 걸작들이라 평한 것이다. 바쟁의 경우는 1967년 출판된「사진 이미 지의 존재론 The Ontology of the Photographic Image」에서 ‘진정한 사실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사진 매체의 객관적 성격을 부각시켰다. 사진 이미지가 대상 그 자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통제하는시/공간적조건에서 자유롭다고 본 것이다. 모더니즘 시기를 거치면서 사진은 점차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구축해 왔다. 더 이상 회화를 쫓으려 하지 않고, 본유적인 매체속성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동 시에 사진은 자체의 예술성도 확고히 해갔다. 회화는 회화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사진은 사진 고유의 특성을 각각 부각시켜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입체주의 등 20 세기를 이끄는 다양한 추상미술에서 그 정체성의 절정을 보았고, 후자는 리얼리즘의 중심으로 그 위상을 공고히 한 것이다. 60년대는 사진에 관한 담론이 가장 활봘하게 이루어졌던 시기였다. 50년이 지났음에도 그 시기에 다뤄졌던 담론 속에는 아직까지도 <현재의 사진이론에> 매우 권위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몇명의 비평/철학자들 이 있다. 사진에 대한 통찰력있는 시선과 섬세하고 날카로운 관점에서 비평했던 작가로 롤랑바르트, 발터벤야민, 수잔손택을 꼽았다.
  • 35. 35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스투디움과 푼크툼" 롤랑바르트의 유작인 <밝은 방>은 발터벤야민, 수잔손택의 사진론과 더불어 사진론의 고전으로 취급을 받고 있다. 바르트는 이 책에서 사 진의 <존재론>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러나 기존의 사진론이 지닌 환 원론적 체계에 이질감을 느끼고, 자신의 독자적인 사진론을 전개한 다. 이때 그는 기존의 현상학을 답습하는 대신 '대범한 현상학'을 전 개한다. 즉, 사진 경험에서의 '감정', '파토스적인 것'의 요소를 가장 중요시하고, '마음의 상처'같은 것으로서 사진을 파고들려고 하는 것 이다. "나는 본다, 나는 느낀다. 고로 나는 께달으며 보며 생각한다." 바르트의 현상학은,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소박한 태도에서 비롯된 다. 그는 '쾌락','시랑','죽음'의 관점에서 사진의 본질에 접근한다. 사진의 현상을 본격적으로 밀고 나가는데 있어서 도입되는 것이 라틴 어의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라는 사진경험에 대한 대립적 개념이다. <스투디움>이란 간단하게 정의하면 사회적으로 코드화된 요소이다. 우리는 다양한 사진에 '관심'을 품고, 그것들을 어떤표현으로서, 역사적 장면으로서 혹은 의식을 채우는 것으로 서 수용한다. 때로 그것들로부터 강한 감동으로 채워진 관심을 낳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사회적코드를 매개로 하며, 훈련이나 교육에 의해 익숙해진 것이다>. 이 차원에 끌리는 것은 비유하자면 영어의 Like정도의 차원에 속한다. 다른 한편으로 Love 개념에 속하는 <푼크툼>은 코드화 되지 않는 요소이며, 그것 자체는 명명/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사진이 원래 정보로 전달되고 공유되고 해독될 수 있는 것이 가능한 것은 거기에 스투디움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지만, 우리에게 사진을 보는 경험이란 그것만이 아니다. 보는 자를 콕콕 찌르고, <가슴을 죄어오는>우발적인 경험, <한 순간 균 열을 내버리는 사진 경험>도 있다. 그 요소가 푼크툼이다. 바르트는 Punctum이라는 라틴어에 포함된 '찔린상처', '작은구멍', '작은 반점', '작은 금'과 같은 의미가 이 경험에 적합하 다고 보았다. 바르트는 불만을 품은 기존의 사진의 논의가 거의 스투디움 ((사회 문화적))해석, 해독)에 해당되며, 따라서 그의 사진론은 푼크툼에 무게를 두고 기술된다. 왜냐하면 바 르트 식의 사진 현상학에서는 푼크툼이라는 경험에 의해서, 보는자가 '자극을 받는것' 에 '사진의 존재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 36. 36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사진의 "아우라"의 상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은 예술이 원초적으로 기반했던 제 의적 가치를 더 이상 필요없도록 만든다.(사진은 대량의 인화가 가능 하다. 여기서 어느 것이 진짜 인화냐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예술 의 생산에서 진품성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그 효력을 잃는 순간, 예술 의 사회적 기능은 변화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이제 예술은 제의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 "예술 생산은 주술에 사용되는 형상물에서 시작하였다. 이때 형상물 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유일하게 중요하였다. 그러나 예술작 품을 기술적으로 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겨나면서 예술작품의 전시 가능성이 커졌다. 이제 예술은 제의적 가치보다는 전시적 가치를 추 구하게 된다. 제의적(주술적) 예술의 경향은 일회성(궁극성)에 있으 며, 전시적 예술의 경향은 반복성 (실험, 새로운 배치)에 있다. 이 반 복성의 기원은 유희에 토대를 둔다." " 우리는 클로즈업을 통하여 불분명하게 보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혀 새로운 물질의 구조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고속촬영을 통해 이미 알려져 있는 움직임의 모티프들만 드러나는 것은 육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임이 분명하다. 다르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의 자리에 무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이 대신 들어선다는 점이다. 카메라는 그것이 지니는 보조수단, 즉 추락과 상승, 중단과 분리, 연장과 단축, 확대와 축소등을 통해 개입한다. 카메라가 사용하는 기법들은 관중의 집단적 지각이 정신병자나 꿈꾸는 자의 개인적 지각 방식을 전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방식들인 것이다."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1977)
  • 37. 37 수잔 손택(Susan Sontag) 사진의 "폭력" "사진은 우리에게 개로운 시각기호를 가르쳐 줌으로써 무엇을 어떨게 보 아야 하느냐, 또 관찰할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꾸거나 넓혀 주었다. 사진은 하나의 '문법'이다. 더 중요한 것은 '보는 일' 에 대한 윤리라는 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마치 상습적인 관음증 환자처럼 이 세계를 바라 봄으로써 모든 사건의 의미를 대동소이하게 취급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 자체도 사건인데, 그것도 사진을 찍는 사람이 절대 적인 권리를 갖고 일으키는 사건인 것이다." (수잔손택, 1982) 소위 ‘사회문제’를 다루는 예술이 당사자의 삶을 작업의 소재로 소비하 는 현상, ‘이 작업이 과연 그들의 삶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라는 것에 대 한 의문. 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착한 예술’, ‘착한 디자인’이라는 미명 아래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작업을 소재로 사용한다. 그것은 사진 을 처음 접한 학생이 허름한 시장 골목과 상인을 -그 공간과 그 안에서 살 아가는 사람들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향해 누르는 폭력적인 셔터와 다르 지 않다. 그들의 삶이 가진, 낯설기 때문에 매력적인 시각적인 질감이 갤 러리라는 공간에서 전시되고 소비될 때, 그 행위의 동기는 타인의 관심 에 머물 뿐, 작업의 대상에 어떠한 직접적인 영향도 행사하지 못한다.
  • 38. 38 "해독과 해석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진실도 발견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사물,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상형문자의 기호를 해독하는 이집트 학자가 아닌 배움의 견습생은 없다. 한 측면에서 기호로서 그것은 생산적인 비대칭을 표현하고, 다른 측면에서는 그 비대칭을 소멸시키려고 한다. 기호는 어떤 내적인 차이를 함축하면서 상징의 질서를 예비한다. 우리에게 세계가 나타나는 방식 속에 있는 질적차이, 예술이 없었다면 각자의 영원한 비밀로 남아 있었을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질 들뢰즈 , 프루스트와 기호들, 1987) 사진은 그 본질상 글쓰기와 담론과 같은 다른 부차적인 언어적 메세지들을 통해 설명되는 수동적인 입장에 처하게 된다. 사진의 의미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는 곳은 말과 언어적 표현에 있지만, 사진의 기호들은 바르트가 명명한 푼크툼과 같이 개인의 은밀하고 내밀한 마음에 일렁이는 역동 속에서 아주 세밀한 요소들에 의해 재-정립되고 재-창조되는 것이다. 찔림과 관통, 바로 이러한 현상 속에 사진이 갖는 능동성이 있다. 들뢰즈가 지적한 대로 세계가 개인들 각자의 방식으로 드러나게 되는 질적 차이, 그것을 단적으로 내포하는 매체가 사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사진의 정체성은 내부에서 노출되버린, 망각 속에서 건져진 소외된 기억이다. 예를 들어, 브레송과 아베돈의 포트레이트 (특히 브레송이 찍은 유명인사들의 인물사진)의 몽타주적 배치,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리고 한 화면 안에서 다층 레이어드적으로) 의미와 상징의 연쇄 반응을 다중적으로 구성해 내는 것에 대해. 사진이 회화의 부속이나 아류로서 치부될 것이 아닌, 사진 그 자체만이 창출할 수 있는 시각 알레고리가 현실과 어떤 관계 구도를 맺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진은 단지 재현 (Representation) 을 위한 부차적인 수단으로만 보거나 눈 앞의 현실을 기계적으로 찍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간과하고 미처 몰랐던 잠재적 현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은 비가시적인 것을 구체화시키는 가시적 표현 (Expression)으로서 말이다. 우리가 실존을 하다가 소멸을 맞이하는 것이 자명한 이 인간 세계를 이질적인 시선으로, 비유컨대 평상시와는 전혀 다른 초점의 안경렌즈로 들여다 보게 만드는 것이다. 사진은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 매우 진실한 모습으로 암시하고 있는 유일한 예술적 매체이다. <왜 눈 앞에 엄연히 현전하고 있으면서도 현존하지 않는 그 부재감을 더욱 자극하는가?> 라는 의문이 틈 사이로 들어오고, 현실세계의 <단순히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의 토대를 뒤흔드는 것이다. 상실된 것이 표출되면 (*패러독스적이다; 구멍이 뚫려서 그 텅빔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 같은) 그 특유의 걷잡을 수 없이 불분명하게 덮쳐오는 일종의 우수가 있다. 사진에 관하여 & 연구(작업)방향
  • 39. 39 말도 안되게 동떨어진 실질적 <거리감>과 말도 안되게 밀착하고 있는 듯한 <가까움>이 동시다발적으로 우리의 의식 속으로 쳐들어올때 느껴지는 간극, 사진 배경 뒤로 흘러 들어 오는 저편의 공기, 사운드, 냄새., 현전하는 것이 오히려 부재감을 더욱 고통스럽게 인식하게 만들고, 아득한 거리감을 기계적으로 단축시키며 실황으로 닥쳐오는 목소리는, 우리가 도저히 막을 수 없고, 영원히 곁에 둘 수 없는 사랑하는 대상의 존재와 그 죽음 이후의 공허와 부재를 예고해주기 때문이다. 사진의 역사는 흘러가는 사물과 대상을 우리들의 삶 속에 밀착시키려는 노력으로 진전되어 왔건만 우리는 그 속에서 사진만이 가진 역능을 발견하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나에게 깊은 감동과 영향을 주는 몇 명의 고전 예술가들이 있다. 그들 중 사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서 사진에 관한 역사를 테마로 선정하는 데 결정적인 동기부여를 한, 헝가리 출신의 사진작가 앙드레 케르테츠와 스웨덴 영화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이다. 리서치를 연구해 나가면서 이들의 구성력과 작품성은 사진의 모더니즘 시기와 매우 맞물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진은 나에게 매체로서 갖는 두가지 양명성이 존재한다. 하나는 사진 본연의 시각적 예술성이 그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진을 일종의 하나의 도구와 연장, 종이와도 같이 취급하는 응용미술인데, 옳고 그름과 우열의 문제는 아니지만, 전자가 갖는 압도적인 진공상태, 더할 나위없이 명백하고 진실한 하나의 사실로서, 사진이 갖게 되는 진실성과 솔직함, 어찌보면 다소 강압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한편으론 연약함(기교나 변명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은, 다른 매체들이 흉내낼 수 없는 사진만이 가진 고유한 영역이자 존중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시대가 흐르고 바뀌면서 이것을 다루는 방법과 기술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현재 한국은 <사진>에 관한 연구가 서양에 비해 그렇게 활성화 되어 있지 않은게 사실이다. 다소 제한된 자료와 몇명의 서양 비평가들에게서 그 흔적을 찾는데에 그치지 않고 좀 더 전문화된 교육기관이 필요할 것 같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작업에서 갖는 사진의 영향력은 굉장히 커질 것 같다. 특히 영상과 영화에 대한 관심은 사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각각의 프레임들이 서로 충돌하고 만나는 과정에서 생성되어 가는 새로운 의미와 메세지들은 마치 사진과 영상이 재생되는 사각형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고정된 딱딱해진 현실의 모습에 충격을 혼란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인식의 재구성이라고 해야할까. 사진과 영상을 통해서 내가 지향하는 바는 고정 불변한 어떤 사실성, 불변의 진리, 혹은 뿌리 깊게 정착되어온 허구적 인습, 관념들에 대한 재고이다. (그것을 변화시키는 물리적 힘은 부차적이고 이차적인 파급효과이다) 사진은 이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여러가지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어떠한 작업을 하든 그것의 시작점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내부(에 대한 관심)에 있을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유발되는 파급효과(결과)는 (내 손을 떠나) 삶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른 것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 40. 40 R E F E R E N C E 뉴홀, B. (2003). 사진의 역사(정진국옮김). 서울:열화당. (원서출판 1982) 바르트, R. (2006). 밝은 방 (김웅권옮김). 서울:동문선. 박이현. (2014). 시대는 사진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미술세계. 31. 72-77 벤야민, W. (2007).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옮김). 서울:길. (원서출판 1977) 백명진. (1987). 예술편 : 태동기의 사진과 영화에 관한 연구. 상명여자사범대학. 19(0). 611-630 손영실. (2010). 사진의 메타 역사 정립을 위해. 기초조형학연구. 11(6). 363-370 손택, S. (2005). 사진에 관하여 (이재원옮김). 서울:이후. 신영호. (1986). Man Ray의 Rayograph에 대하여.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이경률. (2010). 19세기 사진제판의 발명과 발견의 역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34(-). 611-647 이경률. (2006). 사진의 여명. 서울:사진마실 이주형. (2000). 핀홀사진의 역사적 맥락과 현대성 연구. 서라벌대학:논문집. 17(0). 219-233 전영백. (2006). 미술사의 사진에 관한 화두. 미술사연구. (20). 311-342. 주형일. (2006). 사진의 지표성과 의미에 대한 고찰. 한국언론학보. 50(1). 355-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