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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신학캠프 2010 시즌 2


무소유 vs 긍정의 힘?
미리보기
PROGRAM.
 09:00-09:30   등록 및 교제

                             사회 : 조석민 교수
 09:30-10:20   기조 강의         강사 : 오세택 목사 (두레교회)
                             광고 : 고상환 사무처장

 10:20-10:30   Tea Time

                             김근주(1층) 전성민(본당)
 10:30-12:10   Session 1
                             조석민(3층) 권연경(3층)

 12:10-13:10   점심식사
 13:10-13:40   연구원 및 과정 소개   전성민 연구위원

                             김근주(본당) 조석민(1층)
 13:40-15:20   Session 2
                             김동춘(3층) 배덕만(3층)

 15:20-15:40   Tea Time

                             전성민(3층) 권연경(1층)
 15:40-17:20   Session 3
                             김동춘(본당) 배덕만(3층)


SECTION
                  주 제                          강 사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김근주 교수
 :느헤미야 개혁 찬찬히 보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전성민 교수
구약성경이 말하는 소유권과 사용권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헌금, 축복의 통로인가?                    조석민 교수
:고후 8-9장을 중심으로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권연경 교수
바울이 들려주는 십자가의 긍정 이야기
                                 (안양대학교)
                                 배덕만 교수
돈과 교회의 역사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김동춘 교수
‘긍정의 힘’에 대한 신학적 비판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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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에 오신 여러분을 마음을 다해 환영합니다.


●본 신학캠프는 총 3개의 Session으로 진행되며, 각 Session당 4 Section으로 나누어 진행합니다.
 먼저 신청서에 체크하신 대로 강의를 들으시고 변동이 있을 경우에는 진행본부에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양해를 구할 것은 사정에 의해 Session 1과 Session 2의 강의가 순거를 서로
 바뀌어 진행되게 되었으니 참고하셔서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장소는 1층과 2층, 3층에 있으며, 강의장 앞에 표찰을 부착하였습니다.
 또한 강의장 사용시에는 청결과 정숙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점심식사는 식당에서 도시락으로 합니다. 또한 본당에 간단한 다과를 준비하였습니다.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즐거운 교제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강의는 추후 단행본으로 출간한 예정입니다. 출간 소식은 느헤미야 홈페이지 등을 통해
 신속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www.nics.or.kr).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오늘 강의는 <한병선 영상만들기>에서 녹화합니다. 영상에 대한 제공은 추후 홈페이지를 통해
 알려드리겠습니다. 1회 캠프 동영상 판매와 신청을 받습니다.


●나눠드린 명찰은 돌아가실 때 등록처에 반납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그 밖의 문의 사항은 등록데스크 및 진행요원에서 해주시면 됩니다.
기조 강의




         두레교회/기독청년아카데미
오세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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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oson 2 5
구약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느                     5:15-16)
     :느헤미야 개혁 찬찬히 보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김근주 교수



1. 느헤미야의 기도(1:5-11)
예루살렘의 참상을 들은 느헤미야는 곧바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그의 기도의 핵심은 이스
라엘 자손의 지은 죄에 대한 자복이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가리켜 “나와 내 아
버지의 집이 범죄”하였다고 고백한다(1:6). 민족이 겪고 있는 참상을 다른 데에서 그 원인을 찾
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느헤미야 기도의 특징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스라엘 자손이 범한 죄의 근본은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한 것이었다(1:7). 느헤미야의 사역을 시작하는 이 기도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1. 현실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은 죄에 대한 깨달음과 고백이다. 느헤미야 스스로의 삶은 그러
한 참담함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지만,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의 참상이 자신과 자신
의 아비 집의 죄악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안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고
통을 함께 나누며 자신의 죄악으로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느헤미야 개혁의 출발점이다.


2. 그에게 있어 이스라엘 자손의 죄악의 핵심은 모세를 통해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그로 인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방에 흩으신 것이 오늘의 참상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망하고 흩어져 있는 것은 결코 국력이 약해서나, 불운해서가 아니
라 여호와께서 명하신 계명을 지키지 않은 때문이다. 그렇다면 느헤미야의 개혁은 당연히 이스
라엘이 떠났던 계명과 율법, 규례로 돌아가는 것을 지향할 것이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서에서 이
루어지고 있는 개혁의 양상은 다름아닌 1장에서의 고백한 대로 여호와의 계명과 율법으로 돌아
간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3. 그는 자신을 가리켜 ‘당신의 종’(1:6,11)이라 부르고,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켜 ‘당신의 종
들’(1:6,10,11)이라고 부른다. 또한 모세역시 ‘당신의 종’(1:7)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모세이건 자신이건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건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다. 참담한 현
실을 살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이스라엘이건, 페르시아 왕실에서 술관원이 되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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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건, 그리고 그 옛날 여호와의 명하시는 대로 계명과 규례를 전하던 모세이건 모두 여호와
의 종들이다. 그들 모두 여호와께서 부르신 자들이며, 여호와의 뜻을 세상 가운데서 행하는 이
들이며, 여호와께 순종해야 하는 이들이다. 스스로가 여호와의 종임을 고백할 때에, 어디에 있
건 그 계명대로 그 뜻대로 순종할 수 있다. 이제 예루살렘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호와의 종일뿐이다.



2. 성벽 재건
허물어진 성벽과 불타버린 성문을 돌아본 느헤미야는 최우선의 과제가 성벽의 재건이라 여겼다.
성벽이 없음으로 인해 이방인들이 자유롭게 출입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제대로 준행하지도 않으
며, 그저 무원칙하게 예루살렘 인근의 필요와 처지를 따라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
래서 성벽을 쌓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예루살렘을 외부로부터 지킬 뿐 아니라, 내부
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결속하기 위한 과제였을 것이다. 이 일의 가장 큰 장애가 될 수 있는 것
은 이것이 제국에 대한 반역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이다. 페르시아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지역에서 성벽을 견고하게 쌓는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불순한 의도를 가진 행동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느헤미야의 공동체를 찾아온 산발랏과 도비야 역시 이러한 행동을 “왕을 배반”
하는 것으로 여겼다(2:19). 에스라서의 성전 건축에 관한 본문에 등장하는 성벽 건축 관련 본문
(스 4:11-22)은 아마 느헤미야 시대의 성벽 건축을 둘러싼 논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
르면 성벽 건축은 반역의 상징이었다. 느헤미야서는 그가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기 전에 이미
건축에 대한 왕실의 허가를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2:5-6), 자칫 이 일은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는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느헤미야때에도 그랬듯이, 예수께서 이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 역시 로마 정부에게는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사건으로 비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를 핍박하고 제거하려는 이들은 이러한 정치적 틀을 이용하여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
며, 느헤미야를 제거하려는 이들 역시 동일한 논리로 그의 시도를 무산시키고자 애쓴다. 느헤미
야가 진행하는 성벽은 페르시아에 대한 저항과 무관하되,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결단
과 직결된다. 성벽을 지은 공동체는 곧바로 여호와의 율법에 따라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는 데에
서(8-10장) 그 점을 볼 수 있다. 페르시아의 식민지에 살고 있지만, 이미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
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이 세
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으며, 주님은 무력으로 나라를 회복하지 않으셨으되, 주님의 선포를 따른
제자들의 삶은 더 이상 세상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이었다. 이러한 유
비를 생각할 때,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재건을 상징한다. 실제로 이 성
벽이 재건된 이후, 안식일의 올바른 준수를 위해 성문을 닫는 사건과 연관하여 다시 언급된다
(13:16-22). 즉 이 성벽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이방 풍습과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삶을
가르는 경계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이 성벽은 전쟁을 위한 것이나 유대인 공동체의 세력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따르는 삶, 그 율법을 따라 순종하는 공동체를 상징한다. 성벽은
전쟁과 힘, 군대와 연관된 소재이지만, 느헤미야서에서 이 성벽은 구별된 공동체를 상징한다.
이 점은 성벽 재건의 과정에서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3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성벽 중건을 보면, 양문, 함메아 망대부터 하나넬망대까지 ➜ 어문 ➜
옛문 ➜ 예루살렘 넓은 성벽 ➜ 화덕 망대 ➜ 골짜기문 ➜ 분문 ➜ 샘문 ➜ 다윗 성에서 내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oson 2 7
려오는 층계 ➜ 성 굽이 군기고 ➜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문 ➜ 내민 망대 ➜ 마문 ➜ 성모
퉁이 성루 ➜ 양문의 순서와 방향으로 성벽이 재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
과 형제 제사장들, 그리고 평지에 사는 다른 제사장들도 성벽 건축에 중요한 역할들을 하였다
(3:1,22,28). 므레못 벤 우리야의 경우, 어문 다음 부분과 엘리아십 집 문 다음 부분 등 두 부분
의 성벽 재건에 참여하였으며, 드고아 사람들 역시 어문과 옛문 사이의 성벽의 한 부분과 내민
망대부터 오벨 성벽까지 두 부분의 성벽 재건에 참여하였다. 므술람 벤 베레갸도 어문과 옛문
사이 한 부분과 마문과 성모퉁이 성루 사이 한 부분을 중수하였다. 금장색들의 경우 웃시엘 벤
할해야는 옛문과 골짜기 문 사이 성벽재건에, 말기야는 함밉갓문에서 성모퉁이 성루 사이 성벽
에 기여하였고, 또 다른 금장색들과 상인들이 성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의 성벽을 중수하였
다. 이 성벽 재건 공사에 참여한 이들을 보면,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칭해지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그들이 사는 지역의 이름으로 칭해 지기도 한다(드고아 사람, 여리고 사람, 기브온
사람, 메로놋 사람, 미스바 사람, 사노아 주민, 느디님 사람). 또 어떤 이들은 그 직업과 함께
불려지며(금장색, 향품 장사, 동문 지기, 상인), 다른 이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지역의 통치자
로 언급되기도 한다(예루살렘, 벧학게렘, 미스바, 그일라).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언급되지만, 어떤 이들은 아버지의 이름이 없이 소개되거나 직업만 덜렁 소개되기도 한다(향품
장사 하나냐, 베냐민, 핫숩, 금장색 말기야). 아예 이름이 전혀 소개되지 않은 채 그들이 속한
집단만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여리고 사람들, 하스나아의 자손들, 드고아 사람들, 평지에 사는
제사장들, 금장색과 상인들). 가문이 유력하면 유력한 대로, 형편이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혹은
가문과는 상관 없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에 그저 속한 채로 이 성벽 재건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런 점에서 성벽 재건 공사는 단지 일부에 의해 진행된 일이 아니라, 당시
유대 인근 지역에 살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유다 사람들에 의해 진행된 역사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유력한 몇 사람에 의해 성벽 공사의 거의 대부분이 진행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여러 사람과 집단이 참여하여 공사가 진행되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지 않는 이들도 대거 이
공사에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이 공사가 단지 예루살렘의 지역 이기주의를 위한 공사가 아니라,
돌아온 귀환 공동체 전체를 위한 상징적인 공사였음을 깨닫게 한다. 이렇게 다른 지역에 사는
이들뿐 아니라, 당연히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공사에 참여하였으며, 이들의 경우 참여
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자기 집과 가까운 곳을 중수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참여하는 이들도
많고 그러다 보니 참여의 규모도 소규모인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성벽 재건은 그
야말로 당시 예루살렘 인근에 형성된 모든 유대인 공동체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주변 이방민족들의 눈에는 지극히 한심스럽고 하염없게 이 재건
작업이 보였을 것이다:


    “…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흑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
    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느 4:2-3)


이러한 조롱과 비웃음들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바라보는 실제적인 객관적인 시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 재건이 주도되었다지만, 이 성벽 재건은 당
시 모든 이스라엘에 의해 함께 마음과 힘을 모아 진행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단지
성을 둘러싸는 성벽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함께 여호와를 섬기고 각자의 형편과 처지를 따라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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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는 공동체를 세운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단지 성벽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참되고 새
로운 공동체가 관건이었다는 점은 5장에서의 토지 개혁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며, 재건이 완성된
후 곧바로 수문 앞 광장에서의 율법책 낭독과 갱신 운동이 잇따른다는 점에서도 확실히 볼 수
있다.



3. 토지 개혁: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5:16)
느헤미야 5장은 성벽 재건의 와중에서 일어났던 재건 공동체의 현실적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다.
유다를 둘러싼 주변 이방 민족들의 위협에 대해 돌아온 이들이 똘똘 뭉쳐서 한 손으로 일을 하
고 한 손으로 병기를 잡은 채 성벽 공사를 진행하였음을 보여주는 4장에 따르면, 이 귀환 공동
체가 같은 마음으로 단단히 연합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5장은 이렇게 연합한
공동체내부에 경제적 갈등 상황이 심각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그 점에서 느헤미야의
개혁은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힘을 모아 성벽을 재건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귀환 공동체내부의 경제적인 형편은 서
로 달랐다. 더욱이 이들에게 흉년이 임하다보니 공동체 내부의 가난한 이들의 곤궁은 극심해졌
다. 자신들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 처지인데다, 페르시아 제국 정부에 납부해야 하는 세금까지
더하여져서, 가난한 이들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포도원이나 땅을 가진 이들은 그것을
저당잡혀서 얼마의 돈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이미 진작에 이 땅들을 저당잡혔거나 그 기간이
오래되어 남에게 땅이 넘어가 버린 이들은 이 흉년을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결국 자신과 자신
의 자녀들이 남의 집에 종살이로 흩어지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는 이들이 많았고, 마침내
이들로부터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왔다. 이제껏 이방 땅에서 종살이하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유의 땅으로 돌아왔지만, 경제적인 곤경은 다시금 그들을 종살이하는 처지로 몰아갔으되, 이
제는 이방인이 아니라 동족에게 종이 되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경작할 수 있는 땅
이 없고 함께 살아가는 자유로운 가족이 없는 한, 자유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구약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단순히 의사결정의 자유라든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행하는 자유이지 않다. 구
약의 자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 위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레위기 25장은 이를 위해 모든 땅이 하나님의 것이며 모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임을 천명하
고 있다(25:23,55). 땅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에게 공평하게 땅의
사용권을 기업으로 주셨으며, 이스라엘의 몸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몸으
로 누구에게도 종이 되지 않게 하셨다.


한 번 나라를 잃었고 그 땅을 잃었던 백성들이기에 땅에 대해 그들이 가지는 생각은 남다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귀환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의 땅을 담보로 해서 돈이나 곡식을 빌려
주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일이나 온전한 회복의 일보다 자신의 일과
자신의 성취와 자신의 안위에만 힘쓰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이었고, 그러한 이기적인
모습의 절정이 형제에게 이식을 취하기와 땅을 매입하기였을 것이다.


개혁과 재건의 와중에서 일어난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느헤미야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 것?
사실 이러한 경제적인 문제는 뿌리가 깊은 것인지라 함부로 다루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여기에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oson 2 9
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일을 처리한다는 것도 거
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역사와 문화에서 이러한 경제적 관계는 건드리지 않
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의 부르짖음과 고통을 내버려둘 경우, 이제 세워질 성벽은 예루살
렘을 중심으로 한 재건 공동체의 회복이 아니라, 재산과 소유를 충분히 지닌 사람들을 보호하는
성벽이 될 뿐이다. 공동체를 지키는 성벽이 아니라, 지킬 것이 많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
리가 될 뿐인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말하지만 실상은 권력과 재물을
가진 사람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것이 알맹이였던 적은 구약의 역사안에서도 곧잘 볼 수 있다.
남왕국 말엽 시드기야 시대를 장식했던 거짓 선지자들의 구원예언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것이
다(렘 28장; 34장).


가난한 백성들의 울부짖음과 형편을 들은 느헤미야는 “크게 노하였”다(5:6). 하나님을 함께 섬기
며 함께 재건해 가는 공동체내부의 빈부격차와 그로 인한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큰 진노와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아쉽게도 오
늘의 우리 교회는 이러한 현실앞에서 진노하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의 경제적 곤경을 보고도 심
상히 여기며 그저 정신적인 위로를 전하며 그것을 영적인 축복이라고 치장하기에 분주할 따름
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이 현실에 대한 분노이다.


크게 분노한 느헤미야는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5:7). 이에 대한 히브리어 표현은 인상적이며,
느헤미야가 자문자답하며 심사숙고하였음을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깊은 생각후에 그는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가? 곧바로 그는 “귀족들과 민장들”을 불러 그들을 꾸짖는다. 그 뿐 아니라 그들
을 ‘치기 위한 대회’를 열기까지 한다. 느헤미야의 조치는 얼마나 일방적인가? 가난한 사람들이
왜 가난해졌는지를 따지지 않고, 그들의 책임이나 게으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오직
상류층의 지도자들을 불러 책망하고는 그것도 모자라 공개적인 큰 집회을 열어서 그들을 ‘치고
있다’. 그들에 대한 느헤미야의 책망은 한 가지이다: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
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
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5:8). 느헤미야가 보기에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우리 하나님을 경
외하는 가운데 행”(5:9)하는 것이 아니었다.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하나님 경외는 가난한 이웃과
의 경제적 관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당장에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사들인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을 돌려
줄 것을 명령한다(느 5:11). 부유한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매입하는 것은 그들이 빌려준 돈에
대한 대가일 텐데도 느헤미야는 당장 돌려줄 것을 명한다. 아마도 오늘날에 이러한 것을 명령한
다면, 사유재산에 대한 침해라는 이유로 반발이 극심하였을 것이며, 느헤미야는 더 이상 자신의
개혁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느헤미야 시대의 사람들은 이에 순종하기로 결단하고,
회중들은 함께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 그 말한 대로 행하였다"(느 5:13). 이러한 결단
과 순종이 있을 때에 함께 부르는 찬양이 의미가 있다. 하나의 신앙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아멘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신앙을 가장한 또다른 착취
와 억압의 지속일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할 때에 다음과 같은 느헤미야의 고백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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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느 5:15-16)


사람들이 땅에 집착하게 되고 땅을 소유하기에 몰두하게 될 때에, 느헤미야는 귀환공동체와 또
하나님이 다시 거하게 하신 이 땅을 위해 성곽을 쌓기에 온 힘을 다하였다. 그의 힘은 소유에
있지 않고 관리와 섬김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 돌아왔는데, 여전히 각자 자신의 땅
을 구입하고 땅을 늘려가는 데에만 혈안이 되고 형제의 고통과 눈물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
은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귀환한 것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을 경외”(느 5:9)하는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여기에 나온 ‘하나님께 대한 경외’는 땅과 몸이 하나님의 것임을 선언하며 희
년을 선포하는 레위기 25장에서도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다. 근본적으로 땅에 대한 자세는 하나
님께 대한 경외에서 비롯된다.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하나님 경외는 이웃을 압제하지 않고 착취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땅을 사지 않는 것을 의미하였다. 개개의 규정을 엄밀하게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 대한 경외의 원칙 위에서 주어진 상황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
이라고 할 것이다.



4. 수문 앞 광장 집회(8장)
느헤미야 8장은 7월에 이루어진 집회를 소개하고 있다. 8장1절은 에스라 3장1절과 거의 동일하
며, 초막절이 지켜졌다는 점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전개를 지니고 있다. 또한 에스라 2장의 내용
과 느헤미야 7장의 내용이 동일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귀환 공동체의 계수와 파악이 이어
지는 집회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지닌 대로의 본문은 에스라서와 느
헤미야서 모두 이 귀환 공동체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가리키는 틀로 7월에
이루어진 집회와 초막절을 소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느헤미야8장은 이 7월 집회의 중심에 “모세의 율법책”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에스라가 모세
의 율법책을 읽으면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배치되어 있던 레위인들이 그 말씀의
의미를 풀어서 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 당시의 공용어는 아람어였기에 레위인들의 역할은 히브
리어로 읽고 있는 에스라를 따라 그 의미를 아람어로 번역하여 풀이해주는 일이었을 것으로 여
겨진다(표준새번역개정판; NASB; NJB; Tanakh).


율법의 말씀을 들은 공동체는 모두 울었다. 그리고 이 눈물은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의 격려와
더불어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뀌었다(느 8:10-12).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눈물과 여기에서
나온 기쁨을 경험한 공동체는 이제 더더욱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심과 진지함으로 가득차게
된다.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개혁적 조치들의 근본에는 하나님의 법을 듣고 깨달은 이들의 눈물
과 기쁨이 있다.


에스라를 찾아와 율법의 말씀을 더욱 알고자 할 때, 에스라는 초막절 절기 준수에 대해 백성들
에게 일러준다. 초막절이라는 이름은 신명기 16장13절에도 나오지만, 이 절기에 초막을 짓고 생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oson 2 11
활하는 것은 오직 레위기 23장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규례라는 점에서, 당시에 에스라가 백성들
에게 읽어준 본문은 레위기임을 알 수 있다.



4.1. 초막절 준수
레위기 23장은 절기를 다루고 있다. 레위기의 내용은 크게 보아 1-16장과 17-26장의 두 덩어리
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여호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에 지켜야 하는 규례들로 주로 제
사와 정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는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23장은 여호와 앞에서의 거룩한 삶이라는 큰 주제아래 절기를 지키는
삶을 보여준다. 오경에 절기 관련 본문들이 여러 곳에 있다(출 23:12-19; 34:17-26; 민 28-29장;
신 16:1-17). 민수기의 본문은 이 절기들에 드려지는 제사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나머지 절
기 본문들은 모두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으로 나아와야 하는 순례 절기라는 점을 핵심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레위기 23장의 절기 본문은 이들과 강조점이 확연히 다르다. 우선, 레
위기의 절기 본문은 모든 절기를 이해하는 기본 틀로 안식일을 제시하고 있다. 비록 안식일에
관한 내용이 단 한 절로 표현되어 있지만(23:3), 이 한 절에 담긴 세 가지 내용(7일,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은 그 다음부터 소개되는 거의 모든 절기들에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다. 또한 23장은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를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23:9-22). 칠칠
절 혹은 맥추절로 불리는 이 절기는 다른 절기본문들에서도 간략히 언급되지만, 레위기는 이 절
기를 아주 상세하게 표현한다. 그 뿐 아니라 밀수확에서 절정에 이르는 맥추절이, 사실은 그로
부터 오십일 전인 보리의 첫 수확을 거두는 날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유일하게 강조하는 본문
이 레위기이기도 하다(23:9-14). 보리 첫수확을 드리는 날과 밀의 첫열매 드리는 맥추절의 간격
이 일곱 번의 안식일 즉, 49일이라는 점도 의미깊다. 일곱 안식일은 기계적인 숫자 49일을 의미
하기도 하지만, 일곱이라는 상징적인 숫자가 두 번 반복된다는 점에서 신학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지으시고 7일째에 쉬시므로 그 날을 특별하게 하셨고,
맥추절은 보리 첫수확으로부터 일곱 번의 안식이 경과한 후이기에 특별하다. 농사의 결실과 그
결실을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과 연관된 숫자인 7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레위기가 제시하는
맥추절은 농사와 결부된 일상의 삶 속에서 그 열매를 드리는 제사가 여호와 앞에서의 거룩한
삶임을 강조한다. 이 단락에서 두 번이나 쓰인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23:14,21) 표현은 일상에
대한 강조를 더 한층 두드러지게 한다. 레위기에 있어서 거룩은 단지 성소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같이 일상,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각처에서 드러나게 된다.


23장이 강조하는 또 다른 강조점은 초막절에 대한 기술이다(23:33-36,39-43). 초막절은 일곱째
달 15일부터 7일 동안 지킨다. 신명기 16장13-17절에 따르면 곡식 타작과 포도 소출을 모두 저
장하여 들인 후에 이를 감사하며 지킨 절기가 초막절이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절기본문에서도
확인된다(출 23:16). 레위기에서 초막절 본문은 33-36절과 39-43절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첫 단락은 다른 절기 설명과 거의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날짜, 이름, 기간, 성회, 노동 금
지, 화제등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에 비해 두 번째 단락인 39절 이하는 다른 절기 설명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레위기 초막절 이해의 독자적인 면을 보여준다. 민
수기 29장의 초막절 규례 설명에 이어 29장39절에서 절기 전체를 마무리하는 구절이 들어 있듯
이, 23장의 절기 설명도 38절로 마무리되고 있으며, 이 구절은 민수기 29장39절과 거의 동일한




12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보아도 39절 이하의 초막절 규례 부연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39절 첫머리는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초막절 이해 즉, 토지 소산을 모두 저장한 후에 드리는 절
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초막절 기간 동안에 모든 이스라엘이 초막에 거주할 것을 명령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초막(“수코트/숙곳 tKoSu”)”이라는 단어에서 이 절기의 이름이 나왔다. 그렇
지만, 정작 이 단락에서는 “초막절”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이름이 예상되는 자리에 “여호
와의 절기(“하그 아도나이 hw"hy>-gx;”)”라는 명칭을 적고 있다는 점(23:39)에서 인상적이다1).


레위기에 따르면 이렇게 초막에 거주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때 초막에서 지
낸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언제 “초막”에 거주하였던가? 광야 시절 내내 천막
에 거하였던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나(전정진: 246), 이것은 레위기에서 보듯 나뭇가지로
이루어진 “초막”과는 거리가 멀다. 천막 생활을 기념하려면 얼마든지 가나안 정착이후에도 천막
을 만들어 그 시절을 기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유력한 것은 출애굽기 12장37-42절이라고
할 수 있다. 애굽의 종으로 살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놀라운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430년간의
애굽 체제를 마침내 끝내고 라암셋을 떠나 처음으로 도달한 곳이 바로 “숙곳”이었다. 즉 하나님
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초막’으로 인도하여 거하게 하신 것이다! 출애굽기의 진술은 이스
라엘이 숙곳에 도착하였음을 알린 후, 다시 그들이 그 장소를 떠나기까지(13:19-20)의 기간동안
에 여러 규례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을 전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 동안 “숙곳”에, ‘초막’
에 머무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도착하여 머무른 “숙곳”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 새
로운 여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길고 긴 세월 동안 머무르던 애굽 생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하심을 따라 새출발을
한 공동체에 가득했을 흥분과 열정이 숙곳에 있었을 것이며, 비록 약속을 받았다지만, 그들에게
닥쳐올 앞날에 대한 두려움도 숙곳에 머무른 이스라엘에게 가득하였을 것이다. 새로운 삶에 대
한 흥분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이들의 두려움이야말로 하나님 백성 공동체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까.


초막과 연관하여 한 가지 더 덧붙일 것은 초막 생활의 평등함이다. 그들이 사는 곳이 어떤 곳
이든 모든 이스라엘이 초막절을 지킬 때에 그들은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초막에 거한다. 초막에
거하는 동안 모든 이스라엘은 서로간에 구별도 차이도 없으며, 오직 여호와의 이끄심으로 말미
암아 새로운 땅과 민족을 향해 나선 여정의 동반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함께 초막절
을 지키는 것은 그들이 형제요 하나임을 실질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어떤 이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고 어떤 이들은 부유하게 되고, 또 어떤 이들은 가난
해진다 하여도, 매년 바다 일주일간 지키는 이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뿌리와 출발점을 상기시킨
다. 여기에서 이 “이레”는 참으로 상징적이다. 기계적으로 딱 7일을 머무르지만, 7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을 생각할 때, 이 “이레”는 이스라엘의 삶 전체, 인생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그리 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평등한 공동체이며, 아무 것도 지니지 못하였던 이들
이되, 그들의 평생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소유한 것이 없던 이들이었다! 여호와의




1) “여호와의 절기”라는 표현이 2절과 4절, 37절, 44절에도 쓰였지만, 이들은 모두 “모아데 아도나이”이며, 39
  절의 표현과는 다르다.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oson 2 13
인도하심만 있으면 비록 몸은 초막에 머물지나 흥분과 두려움으로 가득찬 공동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오직 레위기에만 나타나는 이 초막절 규례는 초막을 짓고 일주일간 거하는 삶이 여호와
앞에서의 거룩한 삶의 한 부분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여호와 앞에
서 살아가는 거룩한 공동체를 재확인시킨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공동체는 에스라의 지도를 따라 초막절을 지켰다(느 8:13-18). 산에 가
서 그들이 구할 수 있는 대로 감람나무와 들감람나무, 화석류나무, 종려나무 가지를 구하였고
그것들로 기록된 대로 초막을 만들어 그 안에 거하였다. 이에 대한 17절의 평가는 주목할 만하
다: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이에 따르면 초막을 짓고 초막절을 지킨 것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착 이래 지금이 처음 시행
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여러 본문들은 초막절이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에서 지켜졌음
을 증거하고 있다:


 “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1)이 있도다 하고”(삿 21:19; 또한 삼상 1:3)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월 곧 일곱째 달 절기에 솔로몬 왕에게 모이고”; “그 때에 솔로몬이 칠
 일과 칠 일 도합 십사 일 간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로 지켰는데…”(왕상 8:2,65)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스 3:4)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
 막절을 지킬 것이라”(슥 14:16; 또한 슥 14:18-19)


특히 에스라 3장4절에서도 초막절을 “기록된 규례대로” 지켰다고 서술하면서 느헤미야 8장15절
의 표현과 비슷하지만, 에스라서에서 기록된 규례대로 지킴은 정해진 번제를 매일 드리는 것으
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 구절은 민수기 29장의 초막절 규례가 염두에 두어져 있다고 할 수 있
다. 그렇다면, 기존의 초막절 준수와 느헤미야 8장의 초막절 준수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초막을 짓고 그 안에 머물기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초막절 절기를 지키며 준행하
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사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과 연관된 초막절 역시 대대적인 제사 거행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느헤미야 시대 귀환 공동
체는 초막을 짓는 것을 초막절 준수의 핵심으로 행하였다2). 여기서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
이라는 표현은 첫번째 출애굽과 현재의 사건을 비교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




1) 여기서 “여호와의 명절”로 번역된 히브리말은 “하그 아도나이”로써, 레위기 23장39절에서 초막절의 또 다른
     이름으로 쓰인다.
2) 윌리암슨(H.G.M. Williamson)의 지적처럼, 설령 초막 만들어 거하기가 포로 이전 시기에 지켜졌다 하더라도,
     단지 초막절 절차의 한 부분으로 거행되었을 뿐이지, 그 의미를 충분히 살려서 거행된 것은 아니었다고 이
     해할 수도 있다. Williamson, Ezra,Nehemiah(WBC;Waco:WordBooks,1985),296.느헤미야서의 단호한 언급은
     귀환 공동체야말로 율법에 규정된 대로 초막절을 거행한 첫 집단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14
다1).처음 출애굽을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숙곳에 머물게 하셨듯이, 이제 돌아온 이
스라엘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숙곳에 머무른다. 출애굽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
한 미래가 있듯이, 이제 돌아와 초막에 거하는 귀환 공동체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과 미래가
존재하고 있음을 이러한 비교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비록 돌아온 지 수 십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귀환 공동체 사이에 빈부 격차도 다시 생겨나면서 사회적인 갈등도 있었지만,
느헤미야의 지도를 따라 모든 빚을 탕감함으로 이 갈등이 해결되었다. 이제 에스라의 율법 강독
에 따라, 돌아온 이스라엘이 모두 초막에 거하면서 다시 그들의 출발점에 함께 선 것이다. 함께
초막에 거하였던 공동체는 이후 오직 율법의 말씀에만 따라 근본적이고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
한다(느 9-10장).


그러므로 초막절은 단지 어떤 기념일이나 경축일에서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의 근본을 되돌아보
게 하는 날이다. 그리고 그 근본은 이스라엘을 애굽땅에서 인도해 내신 여호와께 대한 기념이
며, 이러한 이스라엘의 상징은 초막이다. 이제껏 그들의 조상들은 초막절을 성소와 연관된 제사
를 통해 지켜왔다면, 이제 느헤미야 시대 귀환 공동체는 출애굽 공동체와 더불어 초막을 짓고
거기 7일간 거주하는 것으로 초막절을 기념한다. 하나님과 함께 길을 떠난 하나님 백성의 상징
이요, 돌아갈 지점, 매년 마다 기념해야 할 지점은 바로 숙곳, 초막이다.



4.2. 갱신 운동
10장29-39절에서는 8장의 수문앞 광장 집회를 기점으로 해서 귀환 공동체의 백성들이 회개하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따라 살기로 결단한 내용이 소개된다. 느헤미야 첫머리의 회
개가 그의 개혁으로 구체화되었듯이, 9장에 담긴 긴 회개 기도는 10장29절 이하의 개혁으로 구
체화된다. 여기에는 이방혼인 금지와 안식일 준수를 비롯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드려야 하는
몫에 대한 내용까지 고루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31절
에 있는 대로, 칠 년 안식년을 지키겠다는 부분이다. 이와 더불어 모든 빚의 탕감도 결단의 한
부분으로 선포되었다. 칠 년마다 빚을 면제하는 것은 신명기 15장의 면제년과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신 15:1-11). 그러나 땅을 쉬게 하는 것과 빚의 면제가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
서 신명기 규례와는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신명기 규례의 칠 년 면제년은 각 사람마다 그 기
점이 다르지만, 느헤미야의 칠 년은 모든 공동체에 공통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빚의 면제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은 희년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안식년을 다루고 있는
레위기의 법은 안식년 정신의 확장으로 희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식년 준수 선언은 희
년 준수와도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레위기 23장과 25장에 담긴 절기 규정은 23장3절의 안식
일 규정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안식일의 확장이 25장의 안식년이며, 가장 큰 안식년이 희년
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생각하면 안식년과 희년은 기계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앞에서 살펴



1) Williamson, 296.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끈 여호수아의 이름을 예수아로 적고 있는 점도 특이하
  다. 스룹바벨과 더불어 성전을 재건하고 귀환 공동체를 이끈 사람의 이름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 “예수아”
  로 표기되고 있다는 점에서, 여호수아의 이름을 “예수아”로 표기하는 17절의 표기 역시 첫 번째 출애굽 혹
  은 정착과 두 번째 출애굽 혹은 정착을 평행시키려는 의도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해 P.A. Noss and
  K.J. Thomas, AHandbookonEzraandNehemiah(NewYork:UnitedBibleSocieties,2005),414.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15
보았던 대로, 땅을 원래 맡은 이에게 돌려 주기로 한 조치라든지, 느헤미야가 땅을 사지 아니하
였다는 언급 역시 느헤미야의 개혁의 이면에 희년법이 놓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희년 규정은 실상 안식년 규정의 확장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여호와께 구별
된 백성이므로 거룩하다. 여호와께 구별된 이들은 여호와께서 구별하신 안식일을 지키며 여호와
께서 구별하신 안식년을 지킨다. 그러므로 안식년과 희년은 단지 사회적인 규례가 아니라 여호
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는 거룩을 이루는 규례이다. 그런 점에서 이에 대한 규정들이 레위
기의 “성결 법전”(17-26장)에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고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따라 살기로 언약한 느헤미야 공동체의 개혁에 이러한 안식년의 준수가 포함
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6
구약
        구약성경이 말하는 소유권과 사용권1)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전성민 교수




1. 서론

1.1. 참고 자료

김병하, 희년 사상의 영성화: 오경에서 누가복음까지; 중간기 문헌을 중심으로 (대한기독교서회,
2005); 이학재, 에스겔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 2002); 전성민, “땅의 신학을 재정립하라,”
복음과상황 2005년 9월 1일호: 20-21; 전성민, “성전 너머의 세상: 에스겔 47-48장의 주해와 적용,” 그
말씀 2006년 0월호: 52-61; 전성민, “주전 8세기 유다 부자들의 자업자득: 이사야 5장 8절에서 10절의
주해,” 복음과상황 2007년 1월호: 79-82;


월터 부르그만, 성서로 본 땅 (나눔사, 1991);이안 두굿, 에스겔 (성서유니온, 2003); 스탠리 그렌츠,
기독교 윤리학의 토대와 흐름 (IVP, 2001); Daniel Hawk, Joshua (Liturgical Press, 2000); Tod Linafelt
and Timothy Beal, Ruth and Esther (Liturgical Press, 1999); Norbert Lohfink, S.J., “Poverty in the
Laws of the Ancient Near East and of the Bible,” Theological Studies 52 (1991): 34-50; 캐서린 두웁
자켄펠드, 룻기 (현대성서주석;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G. von Rad, “The Promised Land and
Yahweh's Land in Hexateuch,” in The Problem of the Hexateuch and Other Essays (Oliver and
Boyd Ltd., 1966): 79-93; Gordon Wenham, The Book of Leviticus (Eerdmans, 1979); H.G.M.
Williamson, Isaiah 1-5 (ICC; T & T Clark, 2006); 크리스토퍼 라이트, 에스겔 강해 (IVP, 2004); 크리
스토퍼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 개정판 (IVP, 2006);


안진호, “팔레스타인의 경제적 배경과 야고보서의 연대 추정,”
(http://iktinos.org/bbs/view.php?id=seminar&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
ect_arrange=headnum&desc=asc&no=67);



1) 이 글은 2008년 11월 8일 동안교회에서 열린 2008 동안포럼 “크리스챤, 하나님의 경제를 말하다”에서 “경
   제: 성서에서 길을 찾다 - 구약의 경제윤리적 비전”으로 발표된 글을 조금 수정한 것으로 그 글과 본질적으
   로 같은 것임을 밝힙니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17
1.2. 핵심 논지


1.2.1. “‘내가(혹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은 결코 경제 윤리의 주장에서 최종적인 대답
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시며, 나(혹은 우리)는 단지 위
탁을 받아서 차지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에 속한 어떤 것을 더욱 필
요로 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게 하신다. 땅과 자원의 소유권이 절대
적인 처분권을 수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영과 분배에 대한 책임을 수반한다. 지구의 자
원들을 사용할 수 있는 만인의 권리는, 오직 독점적으로 그 자원을 누리기 위해 소유하고 있는 어떠한
사람의 권리보다 도덕적으로 선행되는 것 같다.”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 개정판, 203, 저자의
강조)


“The right of all to use the resources of the earth seems to be morally prior to the right of any to
own them for exclusive enjoyment.”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148, 저
자의 강조)


1.2.2. “지구의 자원에 대한 접근권과 사용권이 자원들에 대한 사유 재산권에 도덕적 제약을 설정해 주
는 공동의 권리이듯이, 경제 과정의 최종 생산물을 소비하고 향유할 권리 역시 모든 사람의 필요에 의
해 제약을 받는다. ... 그것은 “내 것은 내 것이며, 거기에서 내가 얻어낼 수 있는 무엇이든지 내가 갖
고 소비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라이트, 205-206)


“Just as the right of access to, the use of, the resources of the earth is a shared right that sets moral
limitations to the right of private ownership of resources, so too the right to consume or enjoy the
end product of the economic process is limited by the needs of all. ... which cuts across the idea
that ‘what’s mine is mine and I am entitled to keep and consume whatever I can get out of it‘.”
(Wright, 149)

1.2.3.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
이 두 권리가 왜 분리가 되며, 그 분리가 고대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행해졌는가 혹은 행해지도록 요구
되었는가를 논하는 것이 글의 목표이다.



1.3. 글의 구성

이 글은 먼저 땅에 대한 구약의 두 가지 접근을 살핀다. 역사적 접근과 제의적 접근이 그 두 가지 접근
인데, 전자는 땅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선물임을, 후자는 땅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인할 것이다. 땅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
실은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라는 개념을 통해 통합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두 번째로 소유권과 사
용권의 분리를 보여주는 구약의 예들을 살펴볼 것이다(레위기 19장; 여호수아 21장; 신명기 15, 24장;
레위기 25장). 세 번째 주제는 이러한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를 요구하는 구약의 윤리적 기준은 종종
법이 요구하는 수준 이상임을 확인하는 것이다(룻기 4장). 마지막으로 “땅” 분배와 “노동”에 대한 구약
의 궁극적 비전을 논할 것이다(에스겔 47-48장).




18
2. 본론


2.1. 땅에 대한 두 가지 접근


토지 신유라는 이상적이고 궁극적인 원리만을 주장할 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경제 윤리적 이상과
우리의 현실의 괴리를 느끼고, 그 괴리가 너무 커질 경우, 이상을 무시하고자 하는 경향을 가질 수 있
다. 이에 구약 성경 또한 실제적 소유를 인정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신유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논함으로 구약 성경의 도전을 좀 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2.1.1. 신적 소유권 아래의 땅
(레위기 25: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
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1.2. 신적 선물로서의 땅
- 토지의 실제적 소유권은 이스라엘 각 지파들과 그 지파 내에서 대가족 단위에게 있었다. (민수기 26
장, 특히 52-56절; 민수기 34장; 여호수아 13-19장)


- 또한 “지계표를 옮기는 죄악”도 (신명기 27:17 참고) 토지의 신적 소유와 더불어 사적 소유 (개인적
소유는 아니어도)를 동시에 인정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2.1.3. 폰 라트의 “The Promised Land and Yahweh's Land in the Hexateuch”: 땅에 대한 두 가지 개
념(역사적 개념; 제의적 개념)을 구별


2.1.3.1. 역사적 개념
- 족장들에게 약속된 땅과 그 약속의 성취로서 선물 받는 땅


- 이러한 두가지 중심 주제를 처음과 마지막에 두고, 이집트에서의 노예 살이, 출애굽, 광야에서의 방
황에 관한 기록들이 역사적 흐름의 틀을 이룬다.


2.1.3.2. 제의적 개념
- “여호와가 땅을 소유하신다”라는 믿음이 기본


- 레위기 25:23


- 이 개념에는 첫 열매에 관한 규정, 십일조에 관한 규정, 추수와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방법에 관한 규
정, 그리고 앞에 언급한 구절의 맥락인 안식일 규정 등과 같은 토지의 사용과, 토지의 소산물 등에 관
한 모든 제의적 규정들이 포함된다.


2.1.4. 결론: “약속의 땅” (증여자 giver로서의 여호와) 과 “여호와의 땅” (소유자 owner 로서의 여호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19
와) 이라는 두 주제;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의 신학적 근원



2.2.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를 보여주는 구약의 예들


단편적인 예 (레위기 19:9-10); 소유권과 사용권의 실제적 분리 (여호수아 21장); 빈곤 방지 시스템 (신
명기 15장, 24장); 강제적 주기성을 중심으로 본 희년 제도 (레위기 25장)


2.2.1. 단편적인 예
(레위기 19:9-10)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
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
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2.2.2. 여호수아 21장


2.2.2.1. “기업”(“나할라”; 수 13:6, 7, 8, 14, 15, 23, 24, 28, 29, 32, 33)
- 유산(inheritance)? 소유권의 이전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나할라”의 근원적 의미를 오해하게 할 수 있다.


- “나할라”에 대한 적절한 이해: 여호와의 권위를 통해 주어진 정당한 소유로, 땅에 적용된자면 “정당한
소유지”정도가 될 것이다.


- “정당한 몫이나 받을 권리에 해당하는 것이면 무엇에든지 사용된다. 즉, 법적으로 그리고 고유하게
한 사람이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 것을 의미한다.”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 120)


- 이러한 정당한 소유권이 세대를 이어 주장될 수 있었으며, 이런 경우, “대를 이어서 소유하는 세습되
는 재산”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2.2.2. 그런데 레위지파에게는 가나안 땅이 기업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수 13:14)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
  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음이더라


  (수 13:33)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
  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수 14:3-4) 이는 두 지 파와 반 지파의 기업은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주었음이요 레위 자손에 게는 그들 가운데에
  서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요셉의 자 손이 므낫세와 에브 라임의 두 지파가 되었음이라 이 땅에서 레위
  사람에게 아무 분깃도 주지 아니하고 다만 거주할 성읍들과 가축과 재산을 위한 목초지만 주었으니.


2.2.2.3. 여호수아 21장의 구조
1-42절: 레위자손에게 주어진 성읍과 목초지
         1-3절: 전체의 도입




20
4-7절: 레위를 네 그룹으로 나눔
       8-40절: 네 그룹에게 주어진 목초지가 딸린 성읍들의 이름을 지파별로 기록: 8-40절은 4-7절
       의 상세 해설
43-45절: 여호수아 13-21장의 전체 결론


(수 21:2-3) 가나안 땅 실로에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우리가 거주
할 성읍들과 우리 가축을 위해 그 목초지들을 우리에게 주라 하셨나이다 하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
와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 이 성읍들과 그 목초지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


(참고) 현대의 제사장: (롬 15:16; 벧전 2:5, 9; 계 1:6; 5:10; 약 5:16 참고; 엡 4:11-12 참고): 벧전 2:9 그
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
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
이라


2.2.2.4: 레위 지파에게 땅이 “기업”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성읍들
과 목초지를 사용했다. 다른 지파들이 땅을 정당하게 소유했었으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물
로서, 레위지파의 사용을 위해 내어 놓아야 했다.


2.2.3. 이 원리의 시스템화 1: 빈곤 방지 시스 템 신명기 15장, 24장 (Lohfink, 45)
- 팔레스틴의 소규모 농부가 흉년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고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여
기서 신명기 15:7-11은 그 이웃에게 그에게 돈을 빌려주기를 명한다.


- 그 빚을 갚기 위해 그 농부는 일용 노동자가 되어야만 할 수도 있다. 신명기 24:14-15은 매일의 임금
을 확실히 하도록 한다.


- 만일 돈을 빌려준 사람이 담보를 잡는다면 신명기 24:10-13은 담보권을 어떻게 행사하는 것이 적절
한지를 알려준다.


- 빚 때문에 노예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 되었는데, 마침 안식년이었으면 신명기 15:1-6에 의해 돈을 빌
려준 사람은 지불을 요구하지 말아야 하며 빚은 면제된다.


- 만일 안식년이 아닌 해에 빚 때문에 노예가 되면 신명기 15:12-18에 의해 그 노역은 안식년에 끝나야
하며 주인은 그 채무자에게 새로운 경제적 기반이 될 수 있는 필요한 자원을 제공해야 주어야 한다.


- 이러한 시스템은 어떤 재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누군가의 정당한 소유를 제공하는 것을 요구
하고 있다.


2.2.4. 이 원리의 시스템화 2: 강제적 주기성을 중심으로 본 희년 제도 (레위기 25장)


2.2.4.1. 레위기 25장의 구조와 내용 (전반적 명령과 단계별로 주어진 구체적 규례들 신학적 근거 [38, 42, 55절])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1
- 안식년과 희년 (전반적 명령 1-22절)


- 토지 무르기, 노예 속량, 희년이 되었을 때의 회복 (단계별 규례들 23-55절)


2.2.4.2. 역사 속에서의 희년 (김병하)
- 구약 성경은 안식년의 실행에 관해서는 그 가능성을 증거한다. 하지만 희년 자체의 실행 여부에 대해
서는 명확한 언급이 없다.


- 외경 마카베오상 6장 49, 53절은 안식년 실행을 언급한다. (기원전 164-163년 김병하, 93. Grabbe,
VanderKam 재인용)


  “49 한편 벳술 사람들은 마침 그 해가 그 고장의 안식년이어서 농사를 짓지 못했으므로 양식이 떨어져 더 이상 버
  틸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도시를 버리고 물러나왔다. 왕은 벳술 사람들에게 화평을 제의했다. …52 유다인 들도
  성을 공략하는 기구를 만들어, 그들을 대항하여 오랫동안 싸웠다. 53 그런데 그해는 안식년인데다가 이방인들 사
  이에서 살다가 유다로 돌아온 동포들이 남은 식량을 다 먹어버렸기 때문에 식량이 떨어졌다. 54 그 기근을 참을 길
  이 없어 모두가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갔고 성소에 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공동번역)


-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Ant. 12.378)에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음: “But then their
provisions failed them; what fruits of the ground they had laid up were spent, and the land being
not ploughed that year, continued unsowed, because it was the seventh year, on which, by our
laws, we are obliged to let it lie uncultivated.”


2.2.4.3. 희년의 역사적 실행 여부의 중요한 기준: 희년의 급진적인 특이성 - 주기성
- 비정기적인 약자 층에 대한 배려는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일 수 있으며 “정치적 라이벌을 견제하
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김병하, 86); “정치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 부정기적으로 선포되었던 고대
근동 왕들의 각종 칙령들” (김병 하, 92);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선의 개념으로 희년 규례를 정의한다
면 성서를 비롯한 많은 문헌들의 구절들이 희년 규례로 간주되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희년 규례 정
신 중의 하나인 나눔이나 자선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구절들을 희년 규례라고 규정하는 것은 많은 무
리가 따르는 것이다.” (김병하, 87)


- 즉, 희년의 정신은 부정기적이거나 시기가 계획되어진 자선이나 나눔을 넘어 시혜자의 의도나 계획
을 초월하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다. 시혜자의 다른 의도가 들어갈 가능성을 극소화 시키는 것이다: “신
명기와 레위기에서의 희년 규례들은 부자들로 하여금 매 안식년과 희년 때마다 그들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정기적으로 그들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명하는 급진적인 사회개혁 법안이 된
것이다.” (김병하, 126).


- 주기성의 현대적 개념: 개인의 의지를 초월하는 시스템화



2.3. 법과 윤리의 간극 - 윤리적 기준은 법의 기준 이상이다 (룻기 4장)




22
2.3.1. 핵심 개념: 법적 권리와 도덕적 의무


2.3.2. (룻 4:1-2; 개역개정)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 나
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
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 “아무개여” (히브리어: “플로니 알모니”)


- 열 명이나 증인으로 서는 경우는 구약 다른 곳에 또 나오지 않는다. 아마 거부할 수 없는 증인의 수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증인의 수는 상대방에게만 부담이 될 뿐 아니라 보아스에게도 부담이
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보아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3.3. (룻 4:3-4; 개역개정)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
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
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 밭의 일부를/우리형제 엘리멜렉에게 속한/판다/나오미가/모압 평지에서 돌아온


-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하라/너 외에는 무
를자가 없다/네 다음은 나다


- 이러한 보아스의 제안에 대해 고엘은 간략히 “내가 무르리라”라고 대답한다. 그는 아마도 땅을 무르
는 문제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른다는 의미는 그 땅을 다시 살 권리를 산다는 것이고 그
권리를 행사하여 엘리멜렉의 땅을 가지게 되면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 사람
은 자기에게 주어진 법적인 권리를 십분 사용하고 있다.


2.3.4. (룻 4:5; 개역 개정)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
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 개역(개정)은 땅을 사는 것과 기업을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세우는 것을 동일시 하고 있다. 그러나 다
른 번역들은 약간 다른 상황을 보여준다.


 (공동번역) 보아즈가 다짐하였다. “나오미에게서 밭은 넘겨 받는 날 당신은 고인의 아내 모압 여자 룻도 떠맡아야
 하오. 그리하여 고인의 이름을 이어 그의 유산을 차지할 사람을 낳아 주어야 하오.”


 (표준새번역) 보아스가 다시 말하였다. “그렇다면, a나오미의 손 에서 그 밭을 사는 날로, 고인의 아내인 모압 여인
 룻도 아내로 맞아들여야 하오. 그렇게 하여야만, 그가 물려받은 그 유산이 고인의 이름으로 남게 될 것이오.” (a.
 고대 라 틴어역과 불가타와 시리아어역을 따름. 히, 나오미와 고인의 아내인 모압 여인 룻의 손에서 그 밭 을 사는
 날에, 고인의 이름으로 그 유산이 이어지도록 하시 오)


 (룻 4:9-10 비교) 4: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3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
 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2.3.5. 보아스의 제안의 핵심: 법적 권리를 행사할 때 도덕적 의무도 더해져야 한다
- 법적으로는 땅의 문제와 결혼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로, 땅만 무르는 것으로 고엘의 법적 권리는 끝이
난다. 그런데 여기서 보아스가 룻과의 결혼을 도덕적 의무로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고엘은 룻의 아들
이 태어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나중에 다른 사람에 의해 아들이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 히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남을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과의 결혼은 그러한 아들
의 탄생을 명확히 해주는 것이었고, 또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고 보아스가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아들은 엘리멜렉의 이름을 이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땅을 사는 것과 동시에 희년이라도 되
면 그것을 돌려줘야 하는 상황도 동시에 만드는 것으로, 자신이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면서까지 밭을
사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기 기업에 손해가 될 것이라고 나름의 이유를
대고 있다. 드러내 놓고 결국 금전적인 손해가 날 것이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다.


2.3.6. 보아스와 “아무개”의 차이


“아무개”는 법적인 권리는 누리기를 원했다. 아주 명료하게 “내가 무르겠노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 권리는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나오미는 집안을 이을 자식도 친척
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도덕적 의무”가 부과되자 고엘은 발을 뺀다. 이것이 그를 이름 없는 “아무
개”로 남게 한 것이다.


2.3.7. 보통 사람 “아무개”


2.3.8. 기독인의 윤리 수준


2.3.9. 보아스가 “도덕적 의무”를 감당한 이유: 사랑



2.4. “땅” 분배와 “노동”에 대한 구약의 궁극적 비전 (에스겔 47-48장)


2.4.1. 핵심 개념: 평등과 보편성


2.4.2. 분배에 대한 원칙들(47:13-14; 21-23)


- 47:13-23의 구조: 땅 분배에 대한 서론(13-14); 땅의 사방 경계(15-20); 타국인에게도 기업을 주라는
지시(21-23)


- 이상적인 시대의 원칙: 평등(14절)과 보편성(22-23절).




24
(겔 47:14) 내가 옛적에 내 손을 들어 맹세하여 이 땅을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하였나니 너희는 공평하게 나누
 어 기업을 삼으라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


 (겔 47:22-23) 너희는 이 땅을 나누되 제비 뽑아 너희와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타국인 곧 너희 가운데에서 자
 녀를 낳은 자의 기업이 되게 할지니 너희는 그 타국인을 본토에서 난 이스라엘 족속 같이 여기고 그들도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너희와 함께 기업을 얻게 하되 23 타국인이 머물러 사는 그 지파에서 그 기업을 줄지니라 주 여 호와
 의 말씀이니라


- 지파들의 체제에 타국인("게르")들도 포함될 것이다. 즉, 지파간의 평등의 범위가 이스라엘 이라는
민족의 한 계를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22절). 이스라엘 속에서 여러 계층으로 살
아가던 타국인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어느 정도는 유사한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할례를 받으면 유
월절 식사에도 참여할 수 있었으며(출 12:48), 원한다면 제사와 같은 종교 행위에도 온전히 참여 할 수
있었다(레위기 22:18 참고).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권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땅에 관한 것
이었다. 타국인은 땅을 차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한계는 그들을 "이등 시민"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에스겔의 마지막 환상에서 그러한 제한마저 철폐된다. 이러한 보편성의 원칙이 이상적인 기업 분배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점이다.


2.4.3. 땅의 사방 경계(47:15-20)


2.4.4. 예물로 드릴 땅 (48:8-22; 45:1-7 참고)
- 성읍의 기지 (48:15-19; 45:6): 이 성읍의 기지는 그 중앙에 위치한 성읍(거주지와 전원으로 이루어짐,
15-16절)과 그 둘레의 땅(성읍 사방의 남은 둘레와 성읍 양쪽에 남아있는 땅, 17-18a절)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목할 부분은 이 남아있는 땅의 용도이다. 지파를 막론하고 성읍의 일하는 자들이 이 땅을 경작
할 것이고 그 산물이 그들의 양식이 된다(18b-19절). 즉, 이 땅은 일상적인 노동의 터전인 것이다.


 (겔 48:15) 이 이만 오천 척 다음으로 너비 오천 척은 속된 땅으로 구분하여 성읍을 세우며 거주하는 곳과 전원을
 삼되 성읍이 그 중앙에 있게 할지니


 (겔 48:15; NIV) The remaining area, 5,000 cubits wide and 25,000 cubits long, will be for the common use
 of the city, for houses and for pastureland. The city will be in the center of it.


 (삼상 21: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
 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5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
 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
 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 일상적인 노동의 터전이 비록 “거룩하게 구별할 땅”(“트루마트 하코데쉬”, 10, 18, 21절)과는 구별되
지만 “예물로 드릴 땅”(“하트루마 아쉐르 트리무”, 8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 여호와삼마: 성읍(성전이 아니라)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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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론: 다시 원점으로 그러나 더욱 강력하게


경제적 자원과 산물의 궁극적 소유주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경제적 자원과
산물의 신적 소유만 강조할 경우, 우리는 성경의 요구를 이상적인 것만으로 치부하며, 성경의
도전을 저버릴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경제적 자원과 산물이 궁극적으로 신적 소유 아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의 정당한 실제적 소유권이 현실의 적절한 경제 단위에 “사적”으로도 주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한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여러
본문들은 그 권리가 어떤 필요에 처한 사람의 “사용권”에 우선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한 구약 본문에서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제도화해 놓은 모습들을 찾을 수 있다. 더불어 기독인
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윤리적 수준”은 법을 잘 지키는 정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은
도덕의 최소 기준을 정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서 법적 권리를 주
장하는 것은 “보통”의 모습일 수는 있겠지만, 룻기는 그러한 “보통”사람의 “이름”을 우리에게 전
해주지 않는다. 성경은 이웃 사랑의 근원적 동기를 가지고 법적 권리와 함께 도덕적 의무를 행
했던 사람의 이름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에 “그것은 내 것이다”라는 소유권과 관련된 선언은
어떤 자원과 산물을 누가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최종적 대답이 결코 될 수 없다. “합법”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더 근원적인 가치인 정의와 공평을 행하며 우리의 소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내어 놓는 것이 기독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요구되어지는 경제 윤리
적 삶이며, 어떤 기독인들은 이러한 원리를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 사회 가운데 제도화시키
는 일에 부름을 받았을 것이다. 이런 작업들을 포함한 일상의 노동은, 에스겔의 환상이 보여주
듯,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께 드려질 예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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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헌금, 축복의 통로인가?
    :고린도후서 8-9장을 중심으로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
조석민 교수




들어가며


헌금, 과연 축복의 통로인가? 이 질문은 이 논의의 핵심이 무엇인지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헌금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이 헌금을 드리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헌금을 드리면 정말 복을 받는가? 이 때 그 복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과연 어떻게 헌금을
드려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하여 바울의 서신, 고린도후서 8-9을 중심으로 그 대
답을 찾아 볼 것이다.


첫째, 헌금과 관련된 현재의 문제가 무엇인지 개괄적으로 간략하게 살펴 볼 것이다. 둘째, 헌금
의 성경적 의미를 고린도후서 8-9장을 중심으로 고찰할 것이다. 셋째, 성경이 말하는 복의 의미
를 살펴보고, 헌금과의 관계를 확인할 것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올바른 헌금을 드리기 위한 그
리스도인들의 재물 사용에 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고 실제적인 제안을 할 것이다.



1. 한국 교회의 헌금 문제


한국 교회의 헌금 행위는 현세 구복적인 한국의 토속 종교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
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복의 개념이 물질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한국 교회의
헌금 행위는 토속 종교와 세속적인 복의 개념과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어서 문제가 발생한다.


헌금의 의도나 목적이 성경적이지 않고 토속 종교의 세속적 개념의 복들과 관련되어 있다. 한국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분류하고 있는 헌금의 종류는 교회 마다 다르며, 교회의 형편과 목적에 따
라서 그 숫자가 늘어나거나 줄어든다.


개인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목적 헌금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헌금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특히
복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헌금을 드리는 경우, 그런 행위는 무속 신앙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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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헌금이 늘고 개인의 수입이 오르고 사업이 잘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관련하여 복을 저울질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기복 사상의 영향아래 바알을 섬겼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들은 가나안 종교의 바알 신을 섬기면 풍성한 농산물을 공급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이스라
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신이 참 신이라고 믿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먹
고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
는 신이 참 신이라고 믿는 것이다.



2. 헌금의 성경적 의미


바울이 가르치는 헌금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은 헌금의 의미
를 직접적으로 가르치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그 의미를 알게 한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바
울이 격려한 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모금이었다. 바울은 이 모금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모금 운동(연보)에 대한 근본적인 근거를 제시하는데, 그
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모금 행위에 대하여 “은혜”, “섬기는 일”, “참여함”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모두 헌금과
관계된 말들로 이해할 수 있다.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받아 행하는 인간의 은혜로운 행위
를 의미하며(고후 8:1), “섬기는 일”은 가난한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것이다. “참여함”은 사람들
과의 친교만이 아니라, 교제를 가능하게 하고 원활하게 하는 어떤 구체적인 일을 의미한다.1)



2.1. 고린도후서 8장 해석 요약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를 위한 모금을 호소
하고 있다. 이 모금을 위하여 마케도냐 교회들의 모범을 제시한다. 마케도냐 교회들은 빌립보,
베뢰아, 데살로니가 등이 있다(행 16, 17장). 끝으로 모금한 것을 전달할 사람을 추천하고 있다.



2.1.1. 마케도니아 교회의 모범(8:1-6)


바울이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모금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마케도냐 교회의 구제를 위한 모금에 관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알리고 있다. 마케도냐 교회들
이란 사도행전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베뢰아, 빌립보 교회들이다(행16:11-17:14, 참조. 롬 15:26).
2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마케도냐 교회의 구제를 위한 모금 운동을 언급한다. 마케도냐 교회
가 환난 중에서 그리고 간난함 속에서도 기쁨으로 풍성한 헌금을 드렸다. 마케도냐 교회의 환난




1) 바울의 모금에 대해서는 갈 2:10, 고전 16:1-4, 고후 8, 9장, 롬 15:25-27에도 언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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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빌 1:29-20과 살전 1:6, 2:14; 3:3-4에 언급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부유해야 남
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마케도냐 교회는 어려운 가운데 예루살렘의 궁핍한 자들을 위하
여 기쁨으로 모금을 하였다.


3-4절은 2절에 설명한 내용의 부연 설명이다. 바울은 마케도냐 교회의 성도들이 어떻게 헌금했
는지를 증언한다. 즉, 힘대로 할 뿐 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풍성한 헌금을 드렸다.
이 일을 바울은 성도 섬기는 일이라고 한다. 즉, 봉사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으로 표현한다.
5절에 의하면 마케도냐 사람들의 태도는 바울의 기대를 넘어섰다. 즉, 그들은 헌금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렸다. 헌금의 기본자세와 태도를 가르친다. 6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그가 말하고자 하는 본론으로 들어간다. 바울은 디도에게 고린도에 가도록 권고한다. 디
도의 임무는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 운동의 결실이다. 이 모금 운동은 이미 그 이전에 시작된
것 같다(고전 16:1-4). 이제 그것을 마감해 줄 것을 부탁한다.



2.1.2.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의 완성을 권고(8:7-15)


바울은 모금에 앞서 고린도 교인들이 풍부함에 관하여 언급한다(고전 1:5). 바울은 고린도 교인
들을 칭찬하면서 모금 운동을 권면하고 있다. 8절은 모금 운동이 강요되어서는 안될 것을                 분
명히 보여주며, 자신의 말이 명령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그들의 사랑과 신앙에 호소하고 있
다. 8절에서 ‘다른 사람들’이란 마케도냐 사람들을 의미한다. 바울은 헌금과 관련해서 사랑이라
는 말을 사용한다. 9절은 헌금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근거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을 본받아 헌금해야 함을 가리킨다(참조. 빌 2:6-8). 10절은 8절과 같은 내용이다. 모금
을 위해 명령해서는 안 되고 각 사람이 기꺼이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바울이
이 일에 뜻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10절의 ‘뜻만 보인다’는 ‘조언하다, 의견을 주다’라는 의
미가 있다. ‘일 년전’은 아마도 고전 16:1-4과 연결되는 것 같다.


11-12절에서 헌금의 자발성의 원리를 다시금 언급한다. 즉, 헌금은 얼마를 내든지 자발적으로
내는 것이 환영을 받을 만한 것이고, 아무 것도 없는 자들에게는 강요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표시일 수 있다. 13절은 모금의 목적에 대해 해명을 하는 것으
로 모금 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오해를 내포하고 있다. 즉 바울을 비난하던 자들이 바울의 모금
운동에 대하여 모금을 빙자로 바울이 그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14절에서 바울은 모금의
목적이 평균에 있다고 주장하며, 평균의 구체적인 의미를 가르친다. 즉, 평균케하는 하는 헌금
의 역할을 설명한다. 15절은 헌금의 원리로서 공평성의 원리를 구약성경에서 찾고 있다. 출애굽
기 16:8의 만나 기적을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필요를 아시고 그 필요에
맞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2.1.3. 모금 전달자를 추천함(8: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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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7-15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미 시작한 모금을 완수해 줄 것을 부탁한다. 이 단락에
서는 모금 전달을 위한 사람, 즉, 바울의 동역자인 디도와 두 명의 형제를 언급한다. 디도는 바
울의 요청을 받아들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갔다. 18-19절에서 디도 외에 두 사람의 형제를 함께
보낸 것은 유대교의 증인에 관한 법이 고려되고 있는 것 같다. 18절에서 동반자에 대하여 묘사
한다. 그가 누구인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모든 교
회를 통해 칭찬을 받는 사람이다. 19절은 계속 이 형제를 말한다. 바울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
릴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 같다. 20-21절은 디도 외에 신용할 만한 두 사람을 보내는 의도와
이유를 알게 한다. 즉, 거액의 헌금을 운반할 때 생기는 어려움을 피하고자 한다. 헌금을 운반
할 때 위험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전달할 두 사람을 함께 보낸 것이다. 23절에서 두 사람의 신
용에 대하여 말한다. 23절에서 디도 및 두 사람의 형제들에 관하여 소개한 이유가 24절에 명시
되고 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들에게 친절과 정성을 베풀라고 권면한다.



2.2. 고린도후서 9장 해석 요약


고린도후서 9장에서 바울은 아가야 지역의 교회들을 향한 모금을 호소하고 있다. 아가야 지방이
란 고린도를 포함한 그 주변의 모든 교회를 포함한다. 바울은 이 지역의 교회들에게 모금을 준
비할 것을 권고하면서 헌금하는 자의 자세와 헌금의 효용성을 언급하면서 모금에 너그러울 것
을 호소한다.



2.2.1. 모금 준비를 권고함(9:1-5)


고린도후서 8:4과 같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성도를 섬가는 일’ 곧, ‘봉사의 일’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헌금의 주제에 관하여 편지를 쓰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2절에서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일에 이미 열성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바울은 마케도냐
교회들에게 고린도 교회를 자랑하였다. 즉 아가야 지방은 일 년 전부터 준비되었다는 자랑인데
아가야의중심은 고린도이다. 칭찬의 결과 마케도냐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자극을 받았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8:1-2에서는 마케도냐 교회의 열심을 칭찬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자극시켜서
헌금에 참여케 하였다. 3-4절에서 바울은 디도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형제들을 고린도
교회에 파송한 것을 언급한다. 이 형제들을 보내는 이유는 바울이 마케도냐 교회에 고린도
교회를 위시한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을 칭찬해 놓고 걱정 반, 소망 반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과연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이 바울이 언급한대로 모금 운동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걱정스러운
것이다. 바울의 불안은 4절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5절에서 바울은 디도와
형제들을 보내는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즉,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여서 억지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운동과 관련해서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후 12:16-17).


3.2. 헌금의 자세와 효용성(9: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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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절은 잠언 11:24과 19:17의 의미를 재현한 것이다(참조. 갈 6:7-9). 바울은 헌금을 하는데
있어서도 자유로운 판단을 소중하게 여긴다. 7절에서 잠언 22:8을 자유롭게 인용하면서 기쁨으
로 그리고 자유롭게 하는 헌금을 칭찬한다. 바울은 8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성도들을 섬기는
일 때문에 가난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도록 능력으로 모든 은사를 풍성하게 내리시
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가르친다. 이것을 위하여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즉 시편 112: 9
을 인용한다. 즉, 가난한 사람들을 볼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 뜻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
님과 의로운 관계를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다. 10절은 8절에서 바울이 언급했던 그리스도인들에
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다시 강조한다. 이 부분은 이사야 55:10을 연상시킨다. 바
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헌금에 참여하는 것이 의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이
일은 헌금을 하는 고린도 성도들과 가난한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모두 유익한 일임을 밝힌다.


바울은 11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풍성히 입었다고 단정한다. 이
은혜의 행위의 목적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12절부터 15절까지 감사의 동기가 계속된다.
바울은 헌금의 효용성을 두 가지 차원에서 다룬다. 첫째는 원래 의도했던 것과 같이 예루살렘의
궁핍한 성도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요, 둘째는 이 물질을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리
게 되는 일이다. 여기서 헌금의 신학적 이해가 확인된다.


13절은 12절의 내용을 부연 설명한다. 이 부분에서 다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하여
헌금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이해를 엿볼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 없
이 헌금은 모아지지 않는다. 즉 헌금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고백의 차원이며, 그 복음에 순
종하는 것이다. 둘째, 헌금은 지역을 초월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한 형제자매임을
확인하는 진정한 교제라고 할 수 있다. 14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헌금을 받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기도한다는 것은 감사의 뜻을 지닌 일종의 중보기도라고 할 수 있다. 15절에서 바울
은 다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2.3. 바울의 모금 행위의 역사적 의미


1) 구제금 모금 운동은 바울의 선교활동 전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돕는 일은 예루살렘 사도회의 때 바울이 결심한 일이다.


2) 구제금 모금 운동은 바울이 세운 모든 교회들 안에서 이루어졌다. 고린도전서 16:1에 의하면
갈라디아교회에도 이 모금 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으며, 마케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교회들의 모범적인 사례를 얘기함으로써 갈라디아, 고린도, 빌립보, 데살로니가 교회 등 바울이
세운 모든 교회들 안에서 시행되었다.


3) 구제금 모금 운동은 일회적인 사건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6:1에서 모금 방식(매주 첫날)을
얘기하는데 이를 예루살렘에 전달하는 것은 단 한 번으로 예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31
4) 구제금 모금 운동은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조심스럽게 실행되었다. 본문에서는 고린도 교회
에서의 모금운동을 마감하도록 디도와 함께 거액의 모금액을 운반하기 위해 두 사람을 동행시
킨다. 이는 오해와 위험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2.4. 바울의 모금 행위의 신학적 의미


1) 구제금 모금 운동은 디아코니아 운동이다. 디아코니아는 섬김, 봉사 등으로 번역되는데, 바울
은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운동에 이 말을 사용한다. 이로써 단순히 물질적으로 궁핍함을 덜어주
는 구제 사업이란 뜻을 넘어서 성도들 상호간에 서로 돕고 섬기는 봉사의 행위라는 것으로 이
해된다.


2) 구제금 모금 운동은 받은 은혜의 나눔 행위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를 위한 모금
은 종종 은혜로 표현되는데 마케도냐 교회들이 가난한 중에도 기쁜 마음으로 풍성하게 모금하
는 헌신적인 태도를 가리키며 하나님이 그 교회에 베푸신 은혜로 표시된다.


3) 구제금 모금 운동은 지역을 초월하여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바울이
세운 모든 이방인 교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표시로서 모금운동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고, 이 헌금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이 베푼 은혜를 받음으로 자신들의 부
족을 보충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은혜를 베푼 자들을 위해
간구하고 그들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이런 행위로써 헌금을 드리는 자와 받는 자 사이
의 연대감이 형성된다. 이것은 개개의 교회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는 역사를 이루는 그리스
도교 역사상 최초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성경이 가르치는 복의 의미


현재의 실용주의적 가치관에서 고려할 때, 시련과 시험, 고난, 등이 없는 상태가 복이다. 이런
복의 개념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널리 퍼져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잘되기만을 위하여 기도한다.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성경이 가르치는 복의 의미를 깨닫기 전에 이미 형성된 토
속 종교의 복 개념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통제하는 가치관으로 남아
있어서 기복 신앙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물질이 많아 진 것이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복의 결과나 경건한 삶의 보상이라고 말할 수 없
다. 오히려 정반대일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에서 배불리 먹고 욕심껏 받았지
만 그들은 욕심을 버리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참조. 시 78:29-31). 이런 경우에
기도 응답이 항상 복은 아니다. 하나님의 복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으로 공동체의 복으로
전해져야 한다. 어떤 특정한 지체 곧 개개인의 성도를 위한 복이라고 할지라도 그 개인이 소속
된 공동체가 함께 누리는 것이어야 진정한 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인의 복지와 안녕만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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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극히 제한적인 복의 간구나 추구는 지양되어야 한다.


구약 성서에게 가르치는 복의 개념과 약속들은 신약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영적 복의 중심 내용이 되는 영생에 관한 가르침은 예수 부활 사건 이전에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제한적인 성격이 있다. 이런 점에서 구약 성서는 지상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될 영적인 복을 간접적으로 예시할 필요가 있었다(참조, 시 133:3).



4. 헌금을 위한 재물 사용의 실제


한국 교회의 실정에서 어떻게 헌금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실제적인 제안은 교회의 형편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기본적인 사상과 개념은 다를 수 없다. 교회의 성도라면 물질적인 책임
이 분명히 있다. 이런 관점에서 헌금을 실제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얼마나, 어떻게 헌금하
느냐는 개인의 믿음과 생활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서 획일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
명한 것은 헌금의 의무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나가며


헌금을 드리는 것은 그 사람의 신앙 행위의 단면으로 신앙 고백적 성격을 지닌다. 바울이 가르
치는 헌금 행위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이다.



[헌금 및 재물 사용을 위한 권장 독서]


•김영봉, 『바늘 귀를 통과한 부자』서울: IVP, 2003.
•박철수, 『축복의 혁명』서울: 뉴스앤조이, 개정판, 2007.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 공진호 역, 『돈을 다시 생각한다』서울: 민음사, 2010.
•래리 버켓(Larry Burkett), 조성표 역, 『돈 걱정없는 가정』대구: CUP, 1992.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33
신약
     바울이 들려주는 십자가의 긍정 이야기




         안양대학교 신학과
권연경 교수



대박과 축복


저의 책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 에는 “대박과 축복”이라는 꼭지의 글이 있다. 거기서 필자가
했던 말의 핵심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축복”이 세상이 말하는 “대박”과 너무 닮았다는 것이다.
물론 복이나 축복은 모두 지극히 성경적인 개념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단어들을 성경 자체의
문법을 따라 사용하지 않고 세상이 말하는 “대박”의 문법을 따라 사용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사
용했던 비유를 다시 사용해 보자면, 우리가 부르는 축복의 노래는 사실상 세상이 지어준 곡조를
표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얼핏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 실상은 세상이
추구하는 대박을 따라간다. 다소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실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같은 욕심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종교적 언어로 위장한다는 것이다.



긍정의 힘


긍정적 태도에 힘이 있다는 생각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분명한 확신을 갖고, 흔들리지 않는
태도로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이 그것을 이룰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에서 쉽게 확
인되는 사실이다. 무언가에 대한 의심이나 두려움은 우리의 태도를 어정쩡하게 하고 모호하게
한다. 그러다 보면 무엇이든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우리의 행동이 한 가지 일관된 신념에
이끌릴 때, 우리의 행동은 매우 효과적이 될 것이다. 그만큼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야
기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우리의 격언이 말하는 바도 그와 같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 신념의 효력을 재확인하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무엇을 긍정하고 무엇
에 마음을 모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결혼하기 전 결혼 상대를 신중하게 고르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바치기 전에 무엇에 마음을 바칠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이 중요하다. 내 삶이 잘
못된 가치를 긍정하고, 거기로부터 힘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생명을 향한 능력이 아닌, 죽음
을 향한 파괴력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무엇을 긍
정하고, 또 무엇을 부정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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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느헤미야신학캠프 2010 시즌 2 무소유 vs 긍정의 힘?
  • 2. 미리보기 PROGRAM. 09:00-09:30 등록 및 교제 사회 : 조석민 교수 09:30-10:20 기조 강의 강사 : 오세택 목사 (두레교회) 광고 : 고상환 사무처장 10:20-10:30 Tea Time 김근주(1층) 전성민(본당) 10:30-12:10 Session 1 조석민(3층) 권연경(3층) 12:10-13:10 점심식사 13:10-13:40 연구원 및 과정 소개 전성민 연구위원 김근주(본당) 조석민(1층) 13:40-15:20 Session 2 김동춘(3층) 배덕만(3층) 15:20-15:40 Tea Time 전성민(3층) 권연경(1층) 15:40-17:20 Session 3 김동춘(본당) 배덕만(3층) SECTION 주 제 강 사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김근주 교수 :느헤미야 개혁 찬찬히 보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전성민 교수 구약성경이 말하는 소유권과 사용권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헌금, 축복의 통로인가? 조석민 교수 :고후 8-9장을 중심으로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권연경 교수 바울이 들려주는 십자가의 긍정 이야기 (안양대학교) 배덕만 교수 돈과 교회의 역사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김동춘 교수 ‘긍정의 힘’에 대한 신학적 비판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 3. 광고하기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에 오신 여러분을 마음을 다해 환영합니다. ●본 신학캠프는 총 3개의 Session으로 진행되며, 각 Session당 4 Section으로 나누어 진행합니다. 먼저 신청서에 체크하신 대로 강의를 들으시고 변동이 있을 경우에는 진행본부에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양해를 구할 것은 사정에 의해 Session 1과 Session 2의 강의가 순거를 서로 바뀌어 진행되게 되었으니 참고하셔서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장소는 1층과 2층, 3층에 있으며, 강의장 앞에 표찰을 부착하였습니다. 또한 강의장 사용시에는 청결과 정숙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점심식사는 식당에서 도시락으로 합니다. 또한 본당에 간단한 다과를 준비하였습니다.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즐거운 교제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강의는 추후 단행본으로 출간한 예정입니다. 출간 소식은 느헤미야 홈페이지 등을 통해 신속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www.nics.or.kr).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오늘 강의는 <한병선 영상만들기>에서 녹화합니다. 영상에 대한 제공은 추후 홈페이지를 통해 알려드리겠습니다. 1회 캠프 동영상 판매와 신청을 받습니다. ●나눠드린 명찰은 돌아가실 때 등록처에 반납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그 밖의 문의 사항은 등록데스크 및 진행요원에서 해주시면 됩니다.
  • 4. 기조 강의 두레교회/기독청년아카데미 오세택 목사 4
  • 6. 구약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느 5:15-16) :느헤미야 개혁 찬찬히 보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김근주 교수 1. 느헤미야의 기도(1:5-11) 예루살렘의 참상을 들은 느헤미야는 곧바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그의 기도의 핵심은 이스 라엘 자손의 지은 죄에 대한 자복이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가리켜 “나와 내 아 버지의 집이 범죄”하였다고 고백한다(1:6). 민족이 겪고 있는 참상을 다른 데에서 그 원인을 찾 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느헤미야 기도의 특징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스라엘 자손이 범한 죄의 근본은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한 것이었다(1:7). 느헤미야의 사역을 시작하는 이 기도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1. 현실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은 죄에 대한 깨달음과 고백이다. 느헤미야 스스로의 삶은 그러 한 참담함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지만,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의 참상이 자신과 자신 의 아비 집의 죄악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안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고 통을 함께 나누며 자신의 죄악으로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느헤미야 개혁의 출발점이다. 2. 그에게 있어 이스라엘 자손의 죄악의 핵심은 모세를 통해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그로 인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방에 흩으신 것이 오늘의 참상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망하고 흩어져 있는 것은 결코 국력이 약해서나, 불운해서가 아니 라 여호와께서 명하신 계명을 지키지 않은 때문이다. 그렇다면 느헤미야의 개혁은 당연히 이스 라엘이 떠났던 계명과 율법, 규례로 돌아가는 것을 지향할 것이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서에서 이 루어지고 있는 개혁의 양상은 다름아닌 1장에서의 고백한 대로 여호와의 계명과 율법으로 돌아 간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3. 그는 자신을 가리켜 ‘당신의 종’(1:6,11)이라 부르고,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켜 ‘당신의 종 들’(1:6,10,11)이라고 부른다. 또한 모세역시 ‘당신의 종’(1:7)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모세이건 자신이건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건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다. 참담한 현 실을 살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이스라엘이건, 페르시아 왕실에서 술관원이 되어 있는 6
  • 7. 자신이건, 그리고 그 옛날 여호와의 명하시는 대로 계명과 규례를 전하던 모세이건 모두 여호와 의 종들이다. 그들 모두 여호와께서 부르신 자들이며, 여호와의 뜻을 세상 가운데서 행하는 이 들이며, 여호와께 순종해야 하는 이들이다. 스스로가 여호와의 종임을 고백할 때에, 어디에 있 건 그 계명대로 그 뜻대로 순종할 수 있다. 이제 예루살렘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호와의 종일뿐이다. 2. 성벽 재건 허물어진 성벽과 불타버린 성문을 돌아본 느헤미야는 최우선의 과제가 성벽의 재건이라 여겼다. 성벽이 없음으로 인해 이방인들이 자유롭게 출입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제대로 준행하지도 않으 며, 그저 무원칙하게 예루살렘 인근의 필요와 처지를 따라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 래서 성벽을 쌓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예루살렘을 외부로부터 지킬 뿐 아니라, 내부 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결속하기 위한 과제였을 것이다. 이 일의 가장 큰 장애가 될 수 있는 것 은 이것이 제국에 대한 반역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이다. 페르시아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지역에서 성벽을 견고하게 쌓는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불순한 의도를 가진 행동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느헤미야의 공동체를 찾아온 산발랏과 도비야 역시 이러한 행동을 “왕을 배반” 하는 것으로 여겼다(2:19). 에스라서의 성전 건축에 관한 본문에 등장하는 성벽 건축 관련 본문 (스 4:11-22)은 아마 느헤미야 시대의 성벽 건축을 둘러싼 논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 르면 성벽 건축은 반역의 상징이었다. 느헤미야서는 그가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기 전에 이미 건축에 대한 왕실의 허가를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2:5-6), 자칫 이 일은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는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느헤미야때에도 그랬듯이, 예수께서 이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 역시 로마 정부에게는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사건으로 비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를 핍박하고 제거하려는 이들은 이러한 정치적 틀을 이용하여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 며, 느헤미야를 제거하려는 이들 역시 동일한 논리로 그의 시도를 무산시키고자 애쓴다. 느헤미 야가 진행하는 성벽은 페르시아에 대한 저항과 무관하되,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결단 과 직결된다. 성벽을 지은 공동체는 곧바로 여호와의 율법에 따라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는 데에 서(8-10장) 그 점을 볼 수 있다. 페르시아의 식민지에 살고 있지만, 이미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 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이 세 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으며, 주님은 무력으로 나라를 회복하지 않으셨으되, 주님의 선포를 따른 제자들의 삶은 더 이상 세상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이었다. 이러한 유 비를 생각할 때,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재건을 상징한다. 실제로 이 성 벽이 재건된 이후, 안식일의 올바른 준수를 위해 성문을 닫는 사건과 연관하여 다시 언급된다 (13:16-22). 즉 이 성벽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이방 풍습과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삶을 가르는 경계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이 성벽은 전쟁을 위한 것이나 유대인 공동체의 세력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따르는 삶, 그 율법을 따라 순종하는 공동체를 상징한다. 성벽은 전쟁과 힘, 군대와 연관된 소재이지만, 느헤미야서에서 이 성벽은 구별된 공동체를 상징한다. 이 점은 성벽 재건의 과정에서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3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성벽 중건을 보면, 양문, 함메아 망대부터 하나넬망대까지 ➜ 어문 ➜ 옛문 ➜ 예루살렘 넓은 성벽 ➜ 화덕 망대 ➜ 골짜기문 ➜ 분문 ➜ 샘문 ➜ 다윗 성에서 내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oson 2 7
  • 8. 려오는 층계 ➜ 성 굽이 군기고 ➜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문 ➜ 내민 망대 ➜ 마문 ➜ 성모 퉁이 성루 ➜ 양문의 순서와 방향으로 성벽이 재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 과 형제 제사장들, 그리고 평지에 사는 다른 제사장들도 성벽 건축에 중요한 역할들을 하였다 (3:1,22,28). 므레못 벤 우리야의 경우, 어문 다음 부분과 엘리아십 집 문 다음 부분 등 두 부분 의 성벽 재건에 참여하였으며, 드고아 사람들 역시 어문과 옛문 사이의 성벽의 한 부분과 내민 망대부터 오벨 성벽까지 두 부분의 성벽 재건에 참여하였다. 므술람 벤 베레갸도 어문과 옛문 사이 한 부분과 마문과 성모퉁이 성루 사이 한 부분을 중수하였다. 금장색들의 경우 웃시엘 벤 할해야는 옛문과 골짜기 문 사이 성벽재건에, 말기야는 함밉갓문에서 성모퉁이 성루 사이 성벽 에 기여하였고, 또 다른 금장색들과 상인들이 성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의 성벽을 중수하였 다. 이 성벽 재건 공사에 참여한 이들을 보면,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칭해지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그들이 사는 지역의 이름으로 칭해 지기도 한다(드고아 사람, 여리고 사람, 기브온 사람, 메로놋 사람, 미스바 사람, 사노아 주민, 느디님 사람). 또 어떤 이들은 그 직업과 함께 불려지며(금장색, 향품 장사, 동문 지기, 상인), 다른 이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지역의 통치자 로 언급되기도 한다(예루살렘, 벧학게렘, 미스바, 그일라).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언급되지만, 어떤 이들은 아버지의 이름이 없이 소개되거나 직업만 덜렁 소개되기도 한다(향품 장사 하나냐, 베냐민, 핫숩, 금장색 말기야). 아예 이름이 전혀 소개되지 않은 채 그들이 속한 집단만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여리고 사람들, 하스나아의 자손들, 드고아 사람들, 평지에 사는 제사장들, 금장색과 상인들). 가문이 유력하면 유력한 대로, 형편이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혹은 가문과는 상관 없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에 그저 속한 채로 이 성벽 재건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런 점에서 성벽 재건 공사는 단지 일부에 의해 진행된 일이 아니라, 당시 유대 인근 지역에 살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유다 사람들에 의해 진행된 역사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유력한 몇 사람에 의해 성벽 공사의 거의 대부분이 진행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여러 사람과 집단이 참여하여 공사가 진행되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지 않는 이들도 대거 이 공사에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이 공사가 단지 예루살렘의 지역 이기주의를 위한 공사가 아니라, 돌아온 귀환 공동체 전체를 위한 상징적인 공사였음을 깨닫게 한다. 이렇게 다른 지역에 사는 이들뿐 아니라, 당연히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공사에 참여하였으며, 이들의 경우 참여 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자기 집과 가까운 곳을 중수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참여하는 이들도 많고 그러다 보니 참여의 규모도 소규모인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성벽 재건은 그 야말로 당시 예루살렘 인근에 형성된 모든 유대인 공동체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주변 이방민족들의 눈에는 지극히 한심스럽고 하염없게 이 재건 작업이 보였을 것이다: “…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흑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 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느 4:2-3) 이러한 조롱과 비웃음들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바라보는 실제적인 객관적인 시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 재건이 주도되었다지만, 이 성벽 재건은 당 시 모든 이스라엘에 의해 함께 마음과 힘을 모아 진행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단지 성을 둘러싸는 성벽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함께 여호와를 섬기고 각자의 형편과 처지를 따라 참 8
  • 9. 여하는 공동체를 세운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단지 성벽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참되고 새 로운 공동체가 관건이었다는 점은 5장에서의 토지 개혁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며, 재건이 완성된 후 곧바로 수문 앞 광장에서의 율법책 낭독과 갱신 운동이 잇따른다는 점에서도 확실히 볼 수 있다. 3. 토지 개혁: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5:16) 느헤미야 5장은 성벽 재건의 와중에서 일어났던 재건 공동체의 현실적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다. 유다를 둘러싼 주변 이방 민족들의 위협에 대해 돌아온 이들이 똘똘 뭉쳐서 한 손으로 일을 하 고 한 손으로 병기를 잡은 채 성벽 공사를 진행하였음을 보여주는 4장에 따르면, 이 귀환 공동 체가 같은 마음으로 단단히 연합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5장은 이렇게 연합한 공동체내부에 경제적 갈등 상황이 심각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그 점에서 느헤미야의 개혁은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힘을 모아 성벽을 재건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귀환 공동체내부의 경제적인 형편은 서 로 달랐다. 더욱이 이들에게 흉년이 임하다보니 공동체 내부의 가난한 이들의 곤궁은 극심해졌 다. 자신들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 처지인데다, 페르시아 제국 정부에 납부해야 하는 세금까지 더하여져서, 가난한 이들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포도원이나 땅을 가진 이들은 그것을 저당잡혀서 얼마의 돈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이미 진작에 이 땅들을 저당잡혔거나 그 기간이 오래되어 남에게 땅이 넘어가 버린 이들은 이 흉년을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결국 자신과 자신 의 자녀들이 남의 집에 종살이로 흩어지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는 이들이 많았고, 마침내 이들로부터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왔다. 이제껏 이방 땅에서 종살이하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유의 땅으로 돌아왔지만, 경제적인 곤경은 다시금 그들을 종살이하는 처지로 몰아갔으되, 이 제는 이방인이 아니라 동족에게 종이 되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경작할 수 있는 땅 이 없고 함께 살아가는 자유로운 가족이 없는 한, 자유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구약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단순히 의사결정의 자유라든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행하는 자유이지 않다. 구 약의 자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 위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레위기 25장은 이를 위해 모든 땅이 하나님의 것이며 모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임을 천명하 고 있다(25:23,55). 땅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에게 공평하게 땅의 사용권을 기업으로 주셨으며, 이스라엘의 몸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몸으 로 누구에게도 종이 되지 않게 하셨다. 한 번 나라를 잃었고 그 땅을 잃었던 백성들이기에 땅에 대해 그들이 가지는 생각은 남다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귀환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의 땅을 담보로 해서 돈이나 곡식을 빌려 주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일이나 온전한 회복의 일보다 자신의 일과 자신의 성취와 자신의 안위에만 힘쓰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이었고, 그러한 이기적인 모습의 절정이 형제에게 이식을 취하기와 땅을 매입하기였을 것이다. 개혁과 재건의 와중에서 일어난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느헤미야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 것? 사실 이러한 경제적인 문제는 뿌리가 깊은 것인지라 함부로 다루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여기에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oson 2 9
  • 10. 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일을 처리한다는 것도 거 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역사와 문화에서 이러한 경제적 관계는 건드리지 않 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의 부르짖음과 고통을 내버려둘 경우, 이제 세워질 성벽은 예루살 렘을 중심으로 한 재건 공동체의 회복이 아니라, 재산과 소유를 충분히 지닌 사람들을 보호하는 성벽이 될 뿐이다. 공동체를 지키는 성벽이 아니라, 지킬 것이 많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 리가 될 뿐인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말하지만 실상은 권력과 재물을 가진 사람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것이 알맹이였던 적은 구약의 역사안에서도 곧잘 볼 수 있다. 남왕국 말엽 시드기야 시대를 장식했던 거짓 선지자들의 구원예언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것이 다(렘 28장; 34장). 가난한 백성들의 울부짖음과 형편을 들은 느헤미야는 “크게 노하였”다(5:6). 하나님을 함께 섬기 며 함께 재건해 가는 공동체내부의 빈부격차와 그로 인한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큰 진노와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아쉽게도 오 늘의 우리 교회는 이러한 현실앞에서 진노하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의 경제적 곤경을 보고도 심 상히 여기며 그저 정신적인 위로를 전하며 그것을 영적인 축복이라고 치장하기에 분주할 따름 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이 현실에 대한 분노이다. 크게 분노한 느헤미야는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5:7). 이에 대한 히브리어 표현은 인상적이며, 느헤미야가 자문자답하며 심사숙고하였음을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깊은 생각후에 그는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가? 곧바로 그는 “귀족들과 민장들”을 불러 그들을 꾸짖는다. 그 뿐 아니라 그들 을 ‘치기 위한 대회’를 열기까지 한다. 느헤미야의 조치는 얼마나 일방적인가? 가난한 사람들이 왜 가난해졌는지를 따지지 않고, 그들의 책임이나 게으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오직 상류층의 지도자들을 불러 책망하고는 그것도 모자라 공개적인 큰 집회을 열어서 그들을 ‘치고 있다’. 그들에 대한 느헤미야의 책망은 한 가지이다: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 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 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5:8). 느헤미야가 보기에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우리 하나님을 경 외하는 가운데 행”(5:9)하는 것이 아니었다.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하나님 경외는 가난한 이웃과 의 경제적 관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당장에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사들인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을 돌려 줄 것을 명령한다(느 5:11). 부유한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매입하는 것은 그들이 빌려준 돈에 대한 대가일 텐데도 느헤미야는 당장 돌려줄 것을 명한다. 아마도 오늘날에 이러한 것을 명령한 다면, 사유재산에 대한 침해라는 이유로 반발이 극심하였을 것이며, 느헤미야는 더 이상 자신의 개혁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느헤미야 시대의 사람들은 이에 순종하기로 결단하고, 회중들은 함께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 그 말한 대로 행하였다"(느 5:13). 이러한 결단 과 순종이 있을 때에 함께 부르는 찬양이 의미가 있다. 하나의 신앙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아멘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신앙을 가장한 또다른 착취 와 억압의 지속일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할 때에 다음과 같은 느헤미야의 고백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10
  • 11.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느 5:15-16) 사람들이 땅에 집착하게 되고 땅을 소유하기에 몰두하게 될 때에, 느헤미야는 귀환공동체와 또 하나님이 다시 거하게 하신 이 땅을 위해 성곽을 쌓기에 온 힘을 다하였다. 그의 힘은 소유에 있지 않고 관리와 섬김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 돌아왔는데, 여전히 각자 자신의 땅 을 구입하고 땅을 늘려가는 데에만 혈안이 되고 형제의 고통과 눈물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 은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귀환한 것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을 경외”(느 5:9)하는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여기에 나온 ‘하나님께 대한 경외’는 땅과 몸이 하나님의 것임을 선언하며 희 년을 선포하는 레위기 25장에서도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다. 근본적으로 땅에 대한 자세는 하나 님께 대한 경외에서 비롯된다.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하나님 경외는 이웃을 압제하지 않고 착취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땅을 사지 않는 것을 의미하였다. 개개의 규정을 엄밀하게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 대한 경외의 원칙 위에서 주어진 상황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 이라고 할 것이다. 4. 수문 앞 광장 집회(8장) 느헤미야 8장은 7월에 이루어진 집회를 소개하고 있다. 8장1절은 에스라 3장1절과 거의 동일하 며, 초막절이 지켜졌다는 점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전개를 지니고 있다. 또한 에스라 2장의 내용 과 느헤미야 7장의 내용이 동일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귀환 공동체의 계수와 파악이 이어 지는 집회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지닌 대로의 본문은 에스라서와 느 헤미야서 모두 이 귀환 공동체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가리키는 틀로 7월에 이루어진 집회와 초막절을 소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느헤미야8장은 이 7월 집회의 중심에 “모세의 율법책”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에스라가 모세 의 율법책을 읽으면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배치되어 있던 레위인들이 그 말씀의 의미를 풀어서 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 당시의 공용어는 아람어였기에 레위인들의 역할은 히브 리어로 읽고 있는 에스라를 따라 그 의미를 아람어로 번역하여 풀이해주는 일이었을 것으로 여 겨진다(표준새번역개정판; NASB; NJB; Tanakh). 율법의 말씀을 들은 공동체는 모두 울었다. 그리고 이 눈물은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의 격려와 더불어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뀌었다(느 8:10-12).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눈물과 여기에서 나온 기쁨을 경험한 공동체는 이제 더더욱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심과 진지함으로 가득차게 된다.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개혁적 조치들의 근본에는 하나님의 법을 듣고 깨달은 이들의 눈물 과 기쁨이 있다. 에스라를 찾아와 율법의 말씀을 더욱 알고자 할 때, 에스라는 초막절 절기 준수에 대해 백성들 에게 일러준다. 초막절이라는 이름은 신명기 16장13절에도 나오지만, 이 절기에 초막을 짓고 생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oson 2 11
  • 12. 활하는 것은 오직 레위기 23장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규례라는 점에서, 당시에 에스라가 백성들 에게 읽어준 본문은 레위기임을 알 수 있다. 4.1. 초막절 준수 레위기 23장은 절기를 다루고 있다. 레위기의 내용은 크게 보아 1-16장과 17-26장의 두 덩어리 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여호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에 지켜야 하는 규례들로 주로 제 사와 정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는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23장은 여호와 앞에서의 거룩한 삶이라는 큰 주제아래 절기를 지키는 삶을 보여준다. 오경에 절기 관련 본문들이 여러 곳에 있다(출 23:12-19; 34:17-26; 민 28-29장; 신 16:1-17). 민수기의 본문은 이 절기들에 드려지는 제사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나머지 절 기 본문들은 모두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으로 나아와야 하는 순례 절기라는 점을 핵심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레위기 23장의 절기 본문은 이들과 강조점이 확연히 다르다. 우선, 레 위기의 절기 본문은 모든 절기를 이해하는 기본 틀로 안식일을 제시하고 있다. 비록 안식일에 관한 내용이 단 한 절로 표현되어 있지만(23:3), 이 한 절에 담긴 세 가지 내용(7일,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은 그 다음부터 소개되는 거의 모든 절기들에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다. 또한 23장은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를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23:9-22). 칠칠 절 혹은 맥추절로 불리는 이 절기는 다른 절기본문들에서도 간략히 언급되지만, 레위기는 이 절 기를 아주 상세하게 표현한다. 그 뿐 아니라 밀수확에서 절정에 이르는 맥추절이, 사실은 그로 부터 오십일 전인 보리의 첫 수확을 거두는 날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유일하게 강조하는 본문 이 레위기이기도 하다(23:9-14). 보리 첫수확을 드리는 날과 밀의 첫열매 드리는 맥추절의 간격 이 일곱 번의 안식일 즉, 49일이라는 점도 의미깊다. 일곱 안식일은 기계적인 숫자 49일을 의미 하기도 하지만, 일곱이라는 상징적인 숫자가 두 번 반복된다는 점에서 신학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지으시고 7일째에 쉬시므로 그 날을 특별하게 하셨고, 맥추절은 보리 첫수확으로부터 일곱 번의 안식이 경과한 후이기에 특별하다. 농사의 결실과 그 결실을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과 연관된 숫자인 7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레위기가 제시하는 맥추절은 농사와 결부된 일상의 삶 속에서 그 열매를 드리는 제사가 여호와 앞에서의 거룩한 삶임을 강조한다. 이 단락에서 두 번이나 쓰인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23:14,21) 표현은 일상에 대한 강조를 더 한층 두드러지게 한다. 레위기에 있어서 거룩은 단지 성소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같이 일상,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각처에서 드러나게 된다. 23장이 강조하는 또 다른 강조점은 초막절에 대한 기술이다(23:33-36,39-43). 초막절은 일곱째 달 15일부터 7일 동안 지킨다. 신명기 16장13-17절에 따르면 곡식 타작과 포도 소출을 모두 저 장하여 들인 후에 이를 감사하며 지킨 절기가 초막절이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절기본문에서도 확인된다(출 23:16). 레위기에서 초막절 본문은 33-36절과 39-43절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첫 단락은 다른 절기 설명과 거의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날짜, 이름, 기간, 성회, 노동 금 지, 화제등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에 비해 두 번째 단락인 39절 이하는 다른 절기 설명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레위기 초막절 이해의 독자적인 면을 보여준다. 민 수기 29장의 초막절 규례 설명에 이어 29장39절에서 절기 전체를 마무리하는 구절이 들어 있듯 이, 23장의 절기 설명도 38절로 마무리되고 있으며, 이 구절은 민수기 29장39절과 거의 동일한 12
  • 13.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보아도 39절 이하의 초막절 규례 부연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39절 첫머리는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초막절 이해 즉, 토지 소산을 모두 저장한 후에 드리는 절 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초막절 기간 동안에 모든 이스라엘이 초막에 거주할 것을 명령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초막(“수코트/숙곳 tKoSu”)”이라는 단어에서 이 절기의 이름이 나왔다. 그렇 지만, 정작 이 단락에서는 “초막절”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이름이 예상되는 자리에 “여호 와의 절기(“하그 아도나이 hw"hy>-gx;”)”라는 명칭을 적고 있다는 점(23:39)에서 인상적이다1). 레위기에 따르면 이렇게 초막에 거주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때 초막에서 지 낸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언제 “초막”에 거주하였던가? 광야 시절 내내 천막 에 거하였던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나(전정진: 246), 이것은 레위기에서 보듯 나뭇가지로 이루어진 “초막”과는 거리가 멀다. 천막 생활을 기념하려면 얼마든지 가나안 정착이후에도 천막 을 만들어 그 시절을 기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유력한 것은 출애굽기 12장37-42절이라고 할 수 있다. 애굽의 종으로 살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놀라운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430년간의 애굽 체제를 마침내 끝내고 라암셋을 떠나 처음으로 도달한 곳이 바로 “숙곳”이었다. 즉 하나님 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초막’으로 인도하여 거하게 하신 것이다! 출애굽기의 진술은 이스 라엘이 숙곳에 도착하였음을 알린 후, 다시 그들이 그 장소를 떠나기까지(13:19-20)의 기간동안 에 여러 규례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을 전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 동안 “숙곳”에, ‘초막’ 에 머무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도착하여 머무른 “숙곳”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 새 로운 여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길고 긴 세월 동안 머무르던 애굽 생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하심을 따라 새출발을 한 공동체에 가득했을 흥분과 열정이 숙곳에 있었을 것이며, 비록 약속을 받았다지만, 그들에게 닥쳐올 앞날에 대한 두려움도 숙곳에 머무른 이스라엘에게 가득하였을 것이다. 새로운 삶에 대 한 흥분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이들의 두려움이야말로 하나님 백성 공동체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까. 초막과 연관하여 한 가지 더 덧붙일 것은 초막 생활의 평등함이다. 그들이 사는 곳이 어떤 곳 이든 모든 이스라엘이 초막절을 지킬 때에 그들은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초막에 거한다. 초막에 거하는 동안 모든 이스라엘은 서로간에 구별도 차이도 없으며, 오직 여호와의 이끄심으로 말미 암아 새로운 땅과 민족을 향해 나선 여정의 동반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함께 초막절 을 지키는 것은 그들이 형제요 하나임을 실질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어떤 이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고 어떤 이들은 부유하게 되고, 또 어떤 이들은 가난 해진다 하여도, 매년 바다 일주일간 지키는 이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뿌리와 출발점을 상기시킨 다. 여기에서 이 “이레”는 참으로 상징적이다. 기계적으로 딱 7일을 머무르지만, 7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을 생각할 때, 이 “이레”는 이스라엘의 삶 전체, 인생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그리 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평등한 공동체이며, 아무 것도 지니지 못하였던 이들 이되, 그들의 평생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소유한 것이 없던 이들이었다! 여호와의 1) “여호와의 절기”라는 표현이 2절과 4절, 37절, 44절에도 쓰였지만, 이들은 모두 “모아데 아도나이”이며, 39 절의 표현과는 다르다.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oson 2 13
  • 14. 인도하심만 있으면 비록 몸은 초막에 머물지나 흥분과 두려움으로 가득찬 공동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오직 레위기에만 나타나는 이 초막절 규례는 초막을 짓고 일주일간 거하는 삶이 여호와 앞에서의 거룩한 삶의 한 부분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여호와 앞에 서 살아가는 거룩한 공동체를 재확인시킨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공동체는 에스라의 지도를 따라 초막절을 지켰다(느 8:13-18). 산에 가 서 그들이 구할 수 있는 대로 감람나무와 들감람나무, 화석류나무, 종려나무 가지를 구하였고 그것들로 기록된 대로 초막을 만들어 그 안에 거하였다. 이에 대한 17절의 평가는 주목할 만하 다: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이에 따르면 초막을 짓고 초막절을 지킨 것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착 이래 지금이 처음 시행 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여러 본문들은 초막절이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에서 지켜졌음 을 증거하고 있다: “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1)이 있도다 하고”(삿 21:19; 또한 삼상 1:3)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월 곧 일곱째 달 절기에 솔로몬 왕에게 모이고”; “그 때에 솔로몬이 칠 일과 칠 일 도합 십사 일 간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로 지켰는데…”(왕상 8:2,65)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스 3:4)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 막절을 지킬 것이라”(슥 14:16; 또한 슥 14:18-19) 특히 에스라 3장4절에서도 초막절을 “기록된 규례대로” 지켰다고 서술하면서 느헤미야 8장15절 의 표현과 비슷하지만, 에스라서에서 기록된 규례대로 지킴은 정해진 번제를 매일 드리는 것으 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 구절은 민수기 29장의 초막절 규례가 염두에 두어져 있다고 할 수 있 다. 그렇다면, 기존의 초막절 준수와 느헤미야 8장의 초막절 준수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초막을 짓고 그 안에 머물기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초막절 절기를 지키며 준행하 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사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과 연관된 초막절 역시 대대적인 제사 거행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느헤미야 시대 귀환 공동 체는 초막을 짓는 것을 초막절 준수의 핵심으로 행하였다2). 여기서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 이라는 표현은 첫번째 출애굽과 현재의 사건을 비교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 1) 여기서 “여호와의 명절”로 번역된 히브리말은 “하그 아도나이”로써, 레위기 23장39절에서 초막절의 또 다른 이름으로 쓰인다. 2) 윌리암슨(H.G.M. Williamson)의 지적처럼, 설령 초막 만들어 거하기가 포로 이전 시기에 지켜졌다 하더라도, 단지 초막절 절차의 한 부분으로 거행되었을 뿐이지, 그 의미를 충분히 살려서 거행된 것은 아니었다고 이 해할 수도 있다. Williamson, Ezra,Nehemiah(WBC;Waco:WordBooks,1985),296.느헤미야서의 단호한 언급은 귀환 공동체야말로 율법에 규정된 대로 초막절을 거행한 첫 집단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14
  • 15. 다1).처음 출애굽을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숙곳에 머물게 하셨듯이, 이제 돌아온 이 스라엘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숙곳에 머무른다. 출애굽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 한 미래가 있듯이, 이제 돌아와 초막에 거하는 귀환 공동체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과 미래가 존재하고 있음을 이러한 비교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비록 돌아온 지 수 십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귀환 공동체 사이에 빈부 격차도 다시 생겨나면서 사회적인 갈등도 있었지만, 느헤미야의 지도를 따라 모든 빚을 탕감함으로 이 갈등이 해결되었다. 이제 에스라의 율법 강독 에 따라, 돌아온 이스라엘이 모두 초막에 거하면서 다시 그들의 출발점에 함께 선 것이다. 함께 초막에 거하였던 공동체는 이후 오직 율법의 말씀에만 따라 근본적이고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 한다(느 9-10장). 그러므로 초막절은 단지 어떤 기념일이나 경축일에서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의 근본을 되돌아보 게 하는 날이다. 그리고 그 근본은 이스라엘을 애굽땅에서 인도해 내신 여호와께 대한 기념이 며, 이러한 이스라엘의 상징은 초막이다. 이제껏 그들의 조상들은 초막절을 성소와 연관된 제사 를 통해 지켜왔다면, 이제 느헤미야 시대 귀환 공동체는 출애굽 공동체와 더불어 초막을 짓고 거기 7일간 거주하는 것으로 초막절을 기념한다. 하나님과 함께 길을 떠난 하나님 백성의 상징 이요, 돌아갈 지점, 매년 마다 기념해야 할 지점은 바로 숙곳, 초막이다. 4.2. 갱신 운동 10장29-39절에서는 8장의 수문앞 광장 집회를 기점으로 해서 귀환 공동체의 백성들이 회개하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따라 살기로 결단한 내용이 소개된다. 느헤미야 첫머리의 회 개가 그의 개혁으로 구체화되었듯이, 9장에 담긴 긴 회개 기도는 10장29절 이하의 개혁으로 구 체화된다. 여기에는 이방혼인 금지와 안식일 준수를 비롯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드려야 하는 몫에 대한 내용까지 고루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31절 에 있는 대로, 칠 년 안식년을 지키겠다는 부분이다. 이와 더불어 모든 빚의 탕감도 결단의 한 부분으로 선포되었다. 칠 년마다 빚을 면제하는 것은 신명기 15장의 면제년과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신 15:1-11). 그러나 땅을 쉬게 하는 것과 빚의 면제가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 서 신명기 규례와는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신명기 규례의 칠 년 면제년은 각 사람마다 그 기 점이 다르지만, 느헤미야의 칠 년은 모든 공동체에 공통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빚의 면제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은 희년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안식년을 다루고 있는 레위기의 법은 안식년 정신의 확장으로 희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식년 준수 선언은 희 년 준수와도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레위기 23장과 25장에 담긴 절기 규정은 23장3절의 안식 일 규정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안식일의 확장이 25장의 안식년이며, 가장 큰 안식년이 희년 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생각하면 안식년과 희년은 기계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앞에서 살펴 1) Williamson, 296.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끈 여호수아의 이름을 예수아로 적고 있는 점도 특이하 다. 스룹바벨과 더불어 성전을 재건하고 귀환 공동체를 이끈 사람의 이름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 “예수아” 로 표기되고 있다는 점에서, 여호수아의 이름을 “예수아”로 표기하는 17절의 표기 역시 첫 번째 출애굽 혹 은 정착과 두 번째 출애굽 혹은 정착을 평행시키려는 의도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해 P.A. Noss and K.J. Thomas, AHandbookonEzraandNehemiah(NewYork:UnitedBibleSocieties,2005),414.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15
  • 16. 보았던 대로, 땅을 원래 맡은 이에게 돌려 주기로 한 조치라든지, 느헤미야가 땅을 사지 아니하 였다는 언급 역시 느헤미야의 개혁의 이면에 희년법이 놓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희년 규정은 실상 안식년 규정의 확장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여호와께 구별 된 백성이므로 거룩하다. 여호와께 구별된 이들은 여호와께서 구별하신 안식일을 지키며 여호와 께서 구별하신 안식년을 지킨다. 그러므로 안식년과 희년은 단지 사회적인 규례가 아니라 여호 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는 거룩을 이루는 규례이다. 그런 점에서 이에 대한 규정들이 레위 기의 “성결 법전”(17-26장)에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고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따라 살기로 언약한 느헤미야 공동체의 개혁에 이러한 안식년의 준수가 포함 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6
  • 17. 구약 구약성경이 말하는 소유권과 사용권1)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전성민 교수 1. 서론 1.1. 참고 자료 김병하, 희년 사상의 영성화: 오경에서 누가복음까지; 중간기 문헌을 중심으로 (대한기독교서회, 2005); 이학재, 에스겔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 2002); 전성민, “땅의 신학을 재정립하라,” 복음과상황 2005년 9월 1일호: 20-21; 전성민, “성전 너머의 세상: 에스겔 47-48장의 주해와 적용,” 그 말씀 2006년 0월호: 52-61; 전성민, “주전 8세기 유다 부자들의 자업자득: 이사야 5장 8절에서 10절의 주해,” 복음과상황 2007년 1월호: 79-82; 월터 부르그만, 성서로 본 땅 (나눔사, 1991);이안 두굿, 에스겔 (성서유니온, 2003); 스탠리 그렌츠, 기독교 윤리학의 토대와 흐름 (IVP, 2001); Daniel Hawk, Joshua (Liturgical Press, 2000); Tod Linafelt and Timothy Beal, Ruth and Esther (Liturgical Press, 1999); Norbert Lohfink, S.J., “Poverty in the Laws of the Ancient Near East and of the Bible,” Theological Studies 52 (1991): 34-50; 캐서린 두웁 자켄펠드, 룻기 (현대성서주석;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G. von Rad, “The Promised Land and Yahweh's Land in Hexateuch,” in The Problem of the Hexateuch and Other Essays (Oliver and Boyd Ltd., 1966): 79-93; Gordon Wenham, The Book of Leviticus (Eerdmans, 1979); H.G.M. Williamson, Isaiah 1-5 (ICC; T & T Clark, 2006); 크리스토퍼 라이트, 에스겔 강해 (IVP, 2004); 크리 스토퍼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 개정판 (IVP, 2006); 안진호, “팔레스타인의 경제적 배경과 야고보서의 연대 추정,” (http://iktinos.org/bbs/view.php?id=seminar&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 ect_arrange=headnum&desc=asc&no=67); 1) 이 글은 2008년 11월 8일 동안교회에서 열린 2008 동안포럼 “크리스챤, 하나님의 경제를 말하다”에서 “경 제: 성서에서 길을 찾다 - 구약의 경제윤리적 비전”으로 발표된 글을 조금 수정한 것으로 그 글과 본질적으 로 같은 것임을 밝힙니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17
  • 18. 1.2. 핵심 논지 1.2.1. “‘내가(혹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은 결코 경제 윤리의 주장에서 최종적인 대답 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시며, 나(혹은 우리)는 단지 위 탁을 받아서 차지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에 속한 어떤 것을 더욱 필 요로 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게 하신다. 땅과 자원의 소유권이 절대 적인 처분권을 수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영과 분배에 대한 책임을 수반한다. 지구의 자 원들을 사용할 수 있는 만인의 권리는, 오직 독점적으로 그 자원을 누리기 위해 소유하고 있는 어떠한 사람의 권리보다 도덕적으로 선행되는 것 같다.”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 개정판, 203, 저자의 강조) “The right of all to use the resources of the earth seems to be morally prior to the right of any to own them for exclusive enjoyment.”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148, 저 자의 강조) 1.2.2. “지구의 자원에 대한 접근권과 사용권이 자원들에 대한 사유 재산권에 도덕적 제약을 설정해 주 는 공동의 권리이듯이, 경제 과정의 최종 생산물을 소비하고 향유할 권리 역시 모든 사람의 필요에 의 해 제약을 받는다. ... 그것은 “내 것은 내 것이며, 거기에서 내가 얻어낼 수 있는 무엇이든지 내가 갖 고 소비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라이트, 205-206) “Just as the right of access to, the use of, the resources of the earth is a shared right that sets moral limitations to the right of private ownership of resources, so too the right to consume or enjoy the end product of the economic process is limited by the needs of all. ... which cuts across the idea that ‘what’s mine is mine and I am entitled to keep and consume whatever I can get out of it‘.” (Wright, 149) 1.2.3.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 이 두 권리가 왜 분리가 되며, 그 분리가 고대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행해졌는가 혹은 행해지도록 요구 되었는가를 논하는 것이 글의 목표이다. 1.3. 글의 구성 이 글은 먼저 땅에 대한 구약의 두 가지 접근을 살핀다. 역사적 접근과 제의적 접근이 그 두 가지 접근 인데, 전자는 땅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선물임을, 후자는 땅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인할 것이다. 땅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 실은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라는 개념을 통해 통합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두 번째로 소유권과 사 용권의 분리를 보여주는 구약의 예들을 살펴볼 것이다(레위기 19장; 여호수아 21장; 신명기 15, 24장; 레위기 25장). 세 번째 주제는 이러한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를 요구하는 구약의 윤리적 기준은 종종 법이 요구하는 수준 이상임을 확인하는 것이다(룻기 4장). 마지막으로 “땅” 분배와 “노동”에 대한 구약 의 궁극적 비전을 논할 것이다(에스겔 47-48장). 18
  • 19. 2. 본론 2.1. 땅에 대한 두 가지 접근 토지 신유라는 이상적이고 궁극적인 원리만을 주장할 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경제 윤리적 이상과 우리의 현실의 괴리를 느끼고, 그 괴리가 너무 커질 경우, 이상을 무시하고자 하는 경향을 가질 수 있 다. 이에 구약 성경 또한 실제적 소유를 인정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신유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논함으로 구약 성경의 도전을 좀 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2.1.1. 신적 소유권 아래의 땅 (레위기 25: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 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1.2. 신적 선물로서의 땅 - 토지의 실제적 소유권은 이스라엘 각 지파들과 그 지파 내에서 대가족 단위에게 있었다. (민수기 26 장, 특히 52-56절; 민수기 34장; 여호수아 13-19장) - 또한 “지계표를 옮기는 죄악”도 (신명기 27:17 참고) 토지의 신적 소유와 더불어 사적 소유 (개인적 소유는 아니어도)를 동시에 인정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2.1.3. 폰 라트의 “The Promised Land and Yahweh's Land in the Hexateuch”: 땅에 대한 두 가지 개 념(역사적 개념; 제의적 개념)을 구별 2.1.3.1. 역사적 개념 - 족장들에게 약속된 땅과 그 약속의 성취로서 선물 받는 땅 - 이러한 두가지 중심 주제를 처음과 마지막에 두고, 이집트에서의 노예 살이, 출애굽, 광야에서의 방 황에 관한 기록들이 역사적 흐름의 틀을 이룬다. 2.1.3.2. 제의적 개념 - “여호와가 땅을 소유하신다”라는 믿음이 기본 - 레위기 25:23 - 이 개념에는 첫 열매에 관한 규정, 십일조에 관한 규정, 추수와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방법에 관한 규 정, 그리고 앞에 언급한 구절의 맥락인 안식일 규정 등과 같은 토지의 사용과, 토지의 소산물 등에 관 한 모든 제의적 규정들이 포함된다. 2.1.4. 결론: “약속의 땅” (증여자 giver로서의 여호와) 과 “여호와의 땅” (소유자 owner 로서의 여호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19
  • 20. 와) 이라는 두 주제;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의 신학적 근원 2.2.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를 보여주는 구약의 예들 단편적인 예 (레위기 19:9-10); 소유권과 사용권의 실제적 분리 (여호수아 21장); 빈곤 방지 시스템 (신 명기 15장, 24장); 강제적 주기성을 중심으로 본 희년 제도 (레위기 25장) 2.2.1. 단편적인 예 (레위기 19:9-10)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 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 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2.2.2. 여호수아 21장 2.2.2.1. “기업”(“나할라”; 수 13:6, 7, 8, 14, 15, 23, 24, 28, 29, 32, 33) - 유산(inheritance)? 소유권의 이전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나할라”의 근원적 의미를 오해하게 할 수 있다. - “나할라”에 대한 적절한 이해: 여호와의 권위를 통해 주어진 정당한 소유로, 땅에 적용된자면 “정당한 소유지”정도가 될 것이다. - “정당한 몫이나 받을 권리에 해당하는 것이면 무엇에든지 사용된다. 즉, 법적으로 그리고 고유하게 한 사람이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 것을 의미한다.”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 120) - 이러한 정당한 소유권이 세대를 이어 주장될 수 있었으며, 이런 경우, “대를 이어서 소유하는 세습되 는 재산”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2.2.2. 그런데 레위지파에게는 가나안 땅이 기업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수 13:14)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 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음이더라 (수 13:33)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 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수 14:3-4) 이는 두 지 파와 반 지파의 기업은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주었음이요 레위 자손에 게는 그들 가운데에 서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요셉의 자 손이 므낫세와 에브 라임의 두 지파가 되었음이라 이 땅에서 레위 사람에게 아무 분깃도 주지 아니하고 다만 거주할 성읍들과 가축과 재산을 위한 목초지만 주었으니. 2.2.2.3. 여호수아 21장의 구조 1-42절: 레위자손에게 주어진 성읍과 목초지 1-3절: 전체의 도입 20
  • 21. 4-7절: 레위를 네 그룹으로 나눔 8-40절: 네 그룹에게 주어진 목초지가 딸린 성읍들의 이름을 지파별로 기록: 8-40절은 4-7절 의 상세 해설 43-45절: 여호수아 13-21장의 전체 결론 (수 21:2-3) 가나안 땅 실로에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우리가 거주 할 성읍들과 우리 가축을 위해 그 목초지들을 우리에게 주라 하셨나이다 하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 와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 이 성읍들과 그 목초지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 (참고) 현대의 제사장: (롬 15:16; 벧전 2:5, 9; 계 1:6; 5:10; 약 5:16 참고; 엡 4:11-12 참고): 벧전 2:9 그 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 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 이라 2.2.2.4: 레위 지파에게 땅이 “기업”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성읍들 과 목초지를 사용했다. 다른 지파들이 땅을 정당하게 소유했었으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물 로서, 레위지파의 사용을 위해 내어 놓아야 했다. 2.2.3. 이 원리의 시스템화 1: 빈곤 방지 시스 템 신명기 15장, 24장 (Lohfink, 45) - 팔레스틴의 소규모 농부가 흉년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고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여 기서 신명기 15:7-11은 그 이웃에게 그에게 돈을 빌려주기를 명한다. - 그 빚을 갚기 위해 그 농부는 일용 노동자가 되어야만 할 수도 있다. 신명기 24:14-15은 매일의 임금 을 확실히 하도록 한다. - 만일 돈을 빌려준 사람이 담보를 잡는다면 신명기 24:10-13은 담보권을 어떻게 행사하는 것이 적절 한지를 알려준다. - 빚 때문에 노예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 되었는데, 마침 안식년이었으면 신명기 15:1-6에 의해 돈을 빌 려준 사람은 지불을 요구하지 말아야 하며 빚은 면제된다. - 만일 안식년이 아닌 해에 빚 때문에 노예가 되면 신명기 15:12-18에 의해 그 노역은 안식년에 끝나야 하며 주인은 그 채무자에게 새로운 경제적 기반이 될 수 있는 필요한 자원을 제공해야 주어야 한다. - 이러한 시스템은 어떤 재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누군가의 정당한 소유를 제공하는 것을 요구 하고 있다. 2.2.4. 이 원리의 시스템화 2: 강제적 주기성을 중심으로 본 희년 제도 (레위기 25장) 2.2.4.1. 레위기 25장의 구조와 내용 (전반적 명령과 단계별로 주어진 구체적 규례들 신학적 근거 [38, 42, 55절])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1
  • 22. - 안식년과 희년 (전반적 명령 1-22절) - 토지 무르기, 노예 속량, 희년이 되었을 때의 회복 (단계별 규례들 23-55절) 2.2.4.2. 역사 속에서의 희년 (김병하) - 구약 성경은 안식년의 실행에 관해서는 그 가능성을 증거한다. 하지만 희년 자체의 실행 여부에 대해 서는 명확한 언급이 없다. - 외경 마카베오상 6장 49, 53절은 안식년 실행을 언급한다. (기원전 164-163년 김병하, 93. Grabbe, VanderKam 재인용) “49 한편 벳술 사람들은 마침 그 해가 그 고장의 안식년이어서 농사를 짓지 못했으므로 양식이 떨어져 더 이상 버 틸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도시를 버리고 물러나왔다. 왕은 벳술 사람들에게 화평을 제의했다. …52 유다인 들도 성을 공략하는 기구를 만들어, 그들을 대항하여 오랫동안 싸웠다. 53 그런데 그해는 안식년인데다가 이방인들 사 이에서 살다가 유다로 돌아온 동포들이 남은 식량을 다 먹어버렸기 때문에 식량이 떨어졌다. 54 그 기근을 참을 길 이 없어 모두가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갔고 성소에 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공동번역) -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Ant. 12.378)에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음: “But then their provisions failed them; what fruits of the ground they had laid up were spent, and the land being not ploughed that year, continued unsowed, because it was the seventh year, on which, by our laws, we are obliged to let it lie uncultivated.” 2.2.4.3. 희년의 역사적 실행 여부의 중요한 기준: 희년의 급진적인 특이성 - 주기성 - 비정기적인 약자 층에 대한 배려는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일 수 있으며 “정치적 라이벌을 견제하 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김병하, 86); “정치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 부정기적으로 선포되었던 고대 근동 왕들의 각종 칙령들” (김병 하, 92);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선의 개념으로 희년 규례를 정의한다 면 성서를 비롯한 많은 문헌들의 구절들이 희년 규례로 간주되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희년 규례 정 신 중의 하나인 나눔이나 자선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구절들을 희년 규례라고 규정하는 것은 많은 무 리가 따르는 것이다.” (김병하, 87) - 즉, 희년의 정신은 부정기적이거나 시기가 계획되어진 자선이나 나눔을 넘어 시혜자의 의도나 계획 을 초월하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다. 시혜자의 다른 의도가 들어갈 가능성을 극소화 시키는 것이다: “신 명기와 레위기에서의 희년 규례들은 부자들로 하여금 매 안식년과 희년 때마다 그들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정기적으로 그들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명하는 급진적인 사회개혁 법안이 된 것이다.” (김병하, 126). - 주기성의 현대적 개념: 개인의 의지를 초월하는 시스템화 2.3. 법과 윤리의 간극 - 윤리적 기준은 법의 기준 이상이다 (룻기 4장) 22
  • 23. 2.3.1. 핵심 개념: 법적 권리와 도덕적 의무 2.3.2. (룻 4:1-2; 개역개정)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 나 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 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 “아무개여” (히브리어: “플로니 알모니”) - 열 명이나 증인으로 서는 경우는 구약 다른 곳에 또 나오지 않는다. 아마 거부할 수 없는 증인의 수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증인의 수는 상대방에게만 부담이 될 뿐 아니라 보아스에게도 부담이 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보아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3.3. (룻 4:3-4; 개역개정)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 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 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 밭의 일부를/우리형제 엘리멜렉에게 속한/판다/나오미가/모압 평지에서 돌아온 -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하라/너 외에는 무 를자가 없다/네 다음은 나다 - 이러한 보아스의 제안에 대해 고엘은 간략히 “내가 무르리라”라고 대답한다. 그는 아마도 땅을 무르 는 문제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른다는 의미는 그 땅을 다시 살 권리를 산다는 것이고 그 권리를 행사하여 엘리멜렉의 땅을 가지게 되면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 사람 은 자기에게 주어진 법적인 권리를 십분 사용하고 있다. 2.3.4. (룻 4:5; 개역 개정)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 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 개역(개정)은 땅을 사는 것과 기업을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세우는 것을 동일시 하고 있다. 그러나 다 른 번역들은 약간 다른 상황을 보여준다. (공동번역) 보아즈가 다짐하였다. “나오미에게서 밭은 넘겨 받는 날 당신은 고인의 아내 모압 여자 룻도 떠맡아야 하오. 그리하여 고인의 이름을 이어 그의 유산을 차지할 사람을 낳아 주어야 하오.” (표준새번역) 보아스가 다시 말하였다. “그렇다면, a나오미의 손 에서 그 밭을 사는 날로, 고인의 아내인 모압 여인 룻도 아내로 맞아들여야 하오. 그렇게 하여야만, 그가 물려받은 그 유산이 고인의 이름으로 남게 될 것이오.” (a. 고대 라 틴어역과 불가타와 시리아어역을 따름. 히, 나오미와 고인의 아내인 모압 여인 룻의 손에서 그 밭 을 사는 날에, 고인의 이름으로 그 유산이 이어지도록 하시 오) (룻 4:9-10 비교) 4: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3
  • 24.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 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2.3.5. 보아스의 제안의 핵심: 법적 권리를 행사할 때 도덕적 의무도 더해져야 한다 - 법적으로는 땅의 문제와 결혼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로, 땅만 무르는 것으로 고엘의 법적 권리는 끝이 난다. 그런데 여기서 보아스가 룻과의 결혼을 도덕적 의무로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고엘은 룻의 아들 이 태어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나중에 다른 사람에 의해 아들이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 히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남을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과의 결혼은 그러한 아들 의 탄생을 명확히 해주는 것이었고, 또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고 보아스가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아들은 엘리멜렉의 이름을 이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땅을 사는 것과 동시에 희년이라도 되 면 그것을 돌려줘야 하는 상황도 동시에 만드는 것으로, 자신이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면서까지 밭을 사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기 기업에 손해가 될 것이라고 나름의 이유를 대고 있다. 드러내 놓고 결국 금전적인 손해가 날 것이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다. 2.3.6. 보아스와 “아무개”의 차이 “아무개”는 법적인 권리는 누리기를 원했다. 아주 명료하게 “내가 무르겠노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 권리는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나오미는 집안을 이을 자식도 친척 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도덕적 의무”가 부과되자 고엘은 발을 뺀다. 이것이 그를 이름 없는 “아무 개”로 남게 한 것이다. 2.3.7. 보통 사람 “아무개” 2.3.8. 기독인의 윤리 수준 2.3.9. 보아스가 “도덕적 의무”를 감당한 이유: 사랑 2.4. “땅” 분배와 “노동”에 대한 구약의 궁극적 비전 (에스겔 47-48장) 2.4.1. 핵심 개념: 평등과 보편성 2.4.2. 분배에 대한 원칙들(47:13-14; 21-23) - 47:13-23의 구조: 땅 분배에 대한 서론(13-14); 땅의 사방 경계(15-20); 타국인에게도 기업을 주라는 지시(21-23) - 이상적인 시대의 원칙: 평등(14절)과 보편성(22-23절). 24
  • 25. (겔 47:14) 내가 옛적에 내 손을 들어 맹세하여 이 땅을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하였나니 너희는 공평하게 나누 어 기업을 삼으라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 (겔 47:22-23) 너희는 이 땅을 나누되 제비 뽑아 너희와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타국인 곧 너희 가운데에서 자 녀를 낳은 자의 기업이 되게 할지니 너희는 그 타국인을 본토에서 난 이스라엘 족속 같이 여기고 그들도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너희와 함께 기업을 얻게 하되 23 타국인이 머물러 사는 그 지파에서 그 기업을 줄지니라 주 여 호와 의 말씀이니라 - 지파들의 체제에 타국인("게르")들도 포함될 것이다. 즉, 지파간의 평등의 범위가 이스라엘 이라는 민족의 한 계를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22절). 이스라엘 속에서 여러 계층으로 살 아가던 타국인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어느 정도는 유사한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할례를 받으면 유 월절 식사에도 참여할 수 있었으며(출 12:48), 원한다면 제사와 같은 종교 행위에도 온전히 참여 할 수 있었다(레위기 22:18 참고).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권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땅에 관한 것 이었다. 타국인은 땅을 차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한계는 그들을 "이등 시민"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에스겔의 마지막 환상에서 그러한 제한마저 철폐된다. 이러한 보편성의 원칙이 이상적인 기업 분배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점이다. 2.4.3. 땅의 사방 경계(47:15-20) 2.4.4. 예물로 드릴 땅 (48:8-22; 45:1-7 참고) - 성읍의 기지 (48:15-19; 45:6): 이 성읍의 기지는 그 중앙에 위치한 성읍(거주지와 전원으로 이루어짐, 15-16절)과 그 둘레의 땅(성읍 사방의 남은 둘레와 성읍 양쪽에 남아있는 땅, 17-18a절)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목할 부분은 이 남아있는 땅의 용도이다. 지파를 막론하고 성읍의 일하는 자들이 이 땅을 경작 할 것이고 그 산물이 그들의 양식이 된다(18b-19절). 즉, 이 땅은 일상적인 노동의 터전인 것이다. (겔 48:15) 이 이만 오천 척 다음으로 너비 오천 척은 속된 땅으로 구분하여 성읍을 세우며 거주하는 곳과 전원을 삼되 성읍이 그 중앙에 있게 할지니 (겔 48:15; NIV) The remaining area, 5,000 cubits wide and 25,000 cubits long, will be for the common use of the city, for houses and for pastureland. The city will be in the center of it. (삼상 21: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 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5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 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 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 일상적인 노동의 터전이 비록 “거룩하게 구별할 땅”(“트루마트 하코데쉬”, 10, 18, 21절)과는 구별되 지만 “예물로 드릴 땅”(“하트루마 아쉐르 트리무”, 8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 여호와삼마: 성읍(성전이 아니라)의 이름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5
  • 26. 3. 결론: 다시 원점으로 그러나 더욱 강력하게 경제적 자원과 산물의 궁극적 소유주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경제적 자원과 산물의 신적 소유만 강조할 경우, 우리는 성경의 요구를 이상적인 것만으로 치부하며, 성경의 도전을 저버릴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경제적 자원과 산물이 궁극적으로 신적 소유 아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의 정당한 실제적 소유권이 현실의 적절한 경제 단위에 “사적”으로도 주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한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여러 본문들은 그 권리가 어떤 필요에 처한 사람의 “사용권”에 우선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한 구약 본문에서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제도화해 놓은 모습들을 찾을 수 있다. 더불어 기독인 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윤리적 수준”은 법을 잘 지키는 정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은 도덕의 최소 기준을 정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서 법적 권리를 주 장하는 것은 “보통”의 모습일 수는 있겠지만, 룻기는 그러한 “보통”사람의 “이름”을 우리에게 전 해주지 않는다. 성경은 이웃 사랑의 근원적 동기를 가지고 법적 권리와 함께 도덕적 의무를 행 했던 사람의 이름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에 “그것은 내 것이다”라는 소유권과 관련된 선언은 어떤 자원과 산물을 누가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최종적 대답이 결코 될 수 없다. “합법”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더 근원적인 가치인 정의와 공평을 행하며 우리의 소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내어 놓는 것이 기독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요구되어지는 경제 윤리 적 삶이며, 어떤 기독인들은 이러한 원리를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 사회 가운데 제도화시키 는 일에 부름을 받았을 것이다. 이런 작업들을 포함한 일상의 노동은, 에스겔의 환상이 보여주 듯,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께 드려질 예물이 될 것이다. 26
  • 27. 신약 헌금, 축복의 통로인가? :고린도후서 8-9장을 중심으로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 조석민 교수 들어가며 헌금, 과연 축복의 통로인가? 이 질문은 이 논의의 핵심이 무엇인지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헌금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이 헌금을 드리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헌금을 드리면 정말 복을 받는가? 이 때 그 복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과연 어떻게 헌금을 드려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하여 바울의 서신, 고린도후서 8-9을 중심으로 그 대 답을 찾아 볼 것이다. 첫째, 헌금과 관련된 현재의 문제가 무엇인지 개괄적으로 간략하게 살펴 볼 것이다. 둘째, 헌금 의 성경적 의미를 고린도후서 8-9장을 중심으로 고찰할 것이다. 셋째, 성경이 말하는 복의 의미 를 살펴보고, 헌금과의 관계를 확인할 것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올바른 헌금을 드리기 위한 그 리스도인들의 재물 사용에 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고 실제적인 제안을 할 것이다. 1. 한국 교회의 헌금 문제 한국 교회의 헌금 행위는 현세 구복적인 한국의 토속 종교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 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복의 개념이 물질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한국 교회의 헌금 행위는 토속 종교와 세속적인 복의 개념과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어서 문제가 발생한다. 헌금의 의도나 목적이 성경적이지 않고 토속 종교의 세속적 개념의 복들과 관련되어 있다. 한국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분류하고 있는 헌금의 종류는 교회 마다 다르며, 교회의 형편과 목적에 따 라서 그 숫자가 늘어나거나 줄어든다. 개인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목적 헌금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헌금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특히 복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헌금을 드리는 경우, 그런 행위는 무속 신앙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7
  • 28. 교회 헌금이 늘고 개인의 수입이 오르고 사업이 잘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관련하여 복을 저울질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기복 사상의 영향아래 바알을 섬겼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들은 가나안 종교의 바알 신을 섬기면 풍성한 농산물을 공급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이스라 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신이 참 신이라고 믿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먹 고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 는 신이 참 신이라고 믿는 것이다. 2. 헌금의 성경적 의미 바울이 가르치는 헌금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은 헌금의 의미 를 직접적으로 가르치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그 의미를 알게 한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바 울이 격려한 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모금이었다. 바울은 이 모금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모금 운동(연보)에 대한 근본적인 근거를 제시하는데, 그 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모금 행위에 대하여 “은혜”, “섬기는 일”, “참여함”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모두 헌금과 관계된 말들로 이해할 수 있다.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받아 행하는 인간의 은혜로운 행위 를 의미하며(고후 8:1), “섬기는 일”은 가난한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것이다. “참여함”은 사람들 과의 친교만이 아니라, 교제를 가능하게 하고 원활하게 하는 어떤 구체적인 일을 의미한다.1) 2.1. 고린도후서 8장 해석 요약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를 위한 모금을 호소 하고 있다. 이 모금을 위하여 마케도냐 교회들의 모범을 제시한다. 마케도냐 교회들은 빌립보, 베뢰아, 데살로니가 등이 있다(행 16, 17장). 끝으로 모금한 것을 전달할 사람을 추천하고 있다. 2.1.1. 마케도니아 교회의 모범(8:1-6) 바울이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모금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마케도냐 교회의 구제를 위한 모금에 관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알리고 있다. 마케도냐 교회들 이란 사도행전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베뢰아, 빌립보 교회들이다(행16:11-17:14, 참조. 롬 15:26). 2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마케도냐 교회의 구제를 위한 모금 운동을 언급한다. 마케도냐 교회 가 환난 중에서 그리고 간난함 속에서도 기쁨으로 풍성한 헌금을 드렸다. 마케도냐 교회의 환난 1) 바울의 모금에 대해서는 갈 2:10, 고전 16:1-4, 고후 8, 9장, 롬 15:25-27에도 언급되어 있다. 28
  • 29. 은 빌 1:29-20과 살전 1:6, 2:14; 3:3-4에 언급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부유해야 남 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마케도냐 교회는 어려운 가운데 예루살렘의 궁핍한 자들을 위하 여 기쁨으로 모금을 하였다. 3-4절은 2절에 설명한 내용의 부연 설명이다. 바울은 마케도냐 교회의 성도들이 어떻게 헌금했 는지를 증언한다. 즉, 힘대로 할 뿐 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풍성한 헌금을 드렸다. 이 일을 바울은 성도 섬기는 일이라고 한다. 즉, 봉사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으로 표현한다. 5절에 의하면 마케도냐 사람들의 태도는 바울의 기대를 넘어섰다. 즉, 그들은 헌금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렸다. 헌금의 기본자세와 태도를 가르친다. 6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그가 말하고자 하는 본론으로 들어간다. 바울은 디도에게 고린도에 가도록 권고한다. 디 도의 임무는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 운동의 결실이다. 이 모금 운동은 이미 그 이전에 시작된 것 같다(고전 16:1-4). 이제 그것을 마감해 줄 것을 부탁한다. 2.1.2.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의 완성을 권고(8:7-15) 바울은 모금에 앞서 고린도 교인들이 풍부함에 관하여 언급한다(고전 1:5). 바울은 고린도 교인 들을 칭찬하면서 모금 운동을 권면하고 있다. 8절은 모금 운동이 강요되어서는 안될 것을 분 명히 보여주며, 자신의 말이 명령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그들의 사랑과 신앙에 호소하고 있 다. 8절에서 ‘다른 사람들’이란 마케도냐 사람들을 의미한다. 바울은 헌금과 관련해서 사랑이라 는 말을 사용한다. 9절은 헌금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근거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을 본받아 헌금해야 함을 가리킨다(참조. 빌 2:6-8). 10절은 8절과 같은 내용이다. 모금 을 위해 명령해서는 안 되고 각 사람이 기꺼이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바울이 이 일에 뜻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10절의 ‘뜻만 보인다’는 ‘조언하다, 의견을 주다’라는 의 미가 있다. ‘일 년전’은 아마도 고전 16:1-4과 연결되는 것 같다. 11-12절에서 헌금의 자발성의 원리를 다시금 언급한다. 즉, 헌금은 얼마를 내든지 자발적으로 내는 것이 환영을 받을 만한 것이고, 아무 것도 없는 자들에게는 강요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표시일 수 있다. 13절은 모금의 목적에 대해 해명을 하는 것으 로 모금 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오해를 내포하고 있다. 즉 바울을 비난하던 자들이 바울의 모금 운동에 대하여 모금을 빙자로 바울이 그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14절에서 바울은 모금의 목적이 평균에 있다고 주장하며, 평균의 구체적인 의미를 가르친다. 즉, 평균케하는 하는 헌금 의 역할을 설명한다. 15절은 헌금의 원리로서 공평성의 원리를 구약성경에서 찾고 있다. 출애굽 기 16:8의 만나 기적을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필요를 아시고 그 필요에 맞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2.1.3. 모금 전달자를 추천함(8:16-24)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9
  • 30. 바울은 7-15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미 시작한 모금을 완수해 줄 것을 부탁한다. 이 단락에 서는 모금 전달을 위한 사람, 즉, 바울의 동역자인 디도와 두 명의 형제를 언급한다. 디도는 바 울의 요청을 받아들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갔다. 18-19절에서 디도 외에 두 사람의 형제를 함께 보낸 것은 유대교의 증인에 관한 법이 고려되고 있는 것 같다. 18절에서 동반자에 대하여 묘사 한다. 그가 누구인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모든 교 회를 통해 칭찬을 받는 사람이다. 19절은 계속 이 형제를 말한다. 바울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 릴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 같다. 20-21절은 디도 외에 신용할 만한 두 사람을 보내는 의도와 이유를 알게 한다. 즉, 거액의 헌금을 운반할 때 생기는 어려움을 피하고자 한다. 헌금을 운반 할 때 위험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전달할 두 사람을 함께 보낸 것이다. 23절에서 두 사람의 신 용에 대하여 말한다. 23절에서 디도 및 두 사람의 형제들에 관하여 소개한 이유가 24절에 명시 되고 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들에게 친절과 정성을 베풀라고 권면한다. 2.2. 고린도후서 9장 해석 요약 고린도후서 9장에서 바울은 아가야 지역의 교회들을 향한 모금을 호소하고 있다. 아가야 지방이 란 고린도를 포함한 그 주변의 모든 교회를 포함한다. 바울은 이 지역의 교회들에게 모금을 준 비할 것을 권고하면서 헌금하는 자의 자세와 헌금의 효용성을 언급하면서 모금에 너그러울 것 을 호소한다. 2.2.1. 모금 준비를 권고함(9:1-5) 고린도후서 8:4과 같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성도를 섬가는 일’ 곧, ‘봉사의 일’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헌금의 주제에 관하여 편지를 쓰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2절에서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일에 이미 열성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바울은 마케도냐 교회들에게 고린도 교회를 자랑하였다. 즉 아가야 지방은 일 년 전부터 준비되었다는 자랑인데 아가야의중심은 고린도이다. 칭찬의 결과 마케도냐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자극을 받았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8:1-2에서는 마케도냐 교회의 열심을 칭찬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자극시켜서 헌금에 참여케 하였다. 3-4절에서 바울은 디도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형제들을 고린도 교회에 파송한 것을 언급한다. 이 형제들을 보내는 이유는 바울이 마케도냐 교회에 고린도 교회를 위시한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을 칭찬해 놓고 걱정 반, 소망 반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과연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이 바울이 언급한대로 모금 운동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걱정스러운 것이다. 바울의 불안은 4절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5절에서 바울은 디도와 형제들을 보내는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즉,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여서 억지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운동과 관련해서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후 12:16-17). 3.2. 헌금의 자세와 효용성(9:6-15) 30
  • 31. 본문 6절은 잠언 11:24과 19:17의 의미를 재현한 것이다(참조. 갈 6:7-9). 바울은 헌금을 하는데 있어서도 자유로운 판단을 소중하게 여긴다. 7절에서 잠언 22:8을 자유롭게 인용하면서 기쁨으 로 그리고 자유롭게 하는 헌금을 칭찬한다. 바울은 8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성도들을 섬기는 일 때문에 가난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도록 능력으로 모든 은사를 풍성하게 내리시 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가르친다. 이것을 위하여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즉 시편 112: 9 을 인용한다. 즉, 가난한 사람들을 볼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 뜻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 님과 의로운 관계를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다. 10절은 8절에서 바울이 언급했던 그리스도인들에 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다시 강조한다. 이 부분은 이사야 55:10을 연상시킨다. 바 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헌금에 참여하는 것이 의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이 일은 헌금을 하는 고린도 성도들과 가난한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모두 유익한 일임을 밝힌다. 바울은 11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풍성히 입었다고 단정한다. 이 은혜의 행위의 목적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12절부터 15절까지 감사의 동기가 계속된다. 바울은 헌금의 효용성을 두 가지 차원에서 다룬다. 첫째는 원래 의도했던 것과 같이 예루살렘의 궁핍한 성도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요, 둘째는 이 물질을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리 게 되는 일이다. 여기서 헌금의 신학적 이해가 확인된다. 13절은 12절의 내용을 부연 설명한다. 이 부분에서 다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하여 헌금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이해를 엿볼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 없 이 헌금은 모아지지 않는다. 즉 헌금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고백의 차원이며, 그 복음에 순 종하는 것이다. 둘째, 헌금은 지역을 초월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한 형제자매임을 확인하는 진정한 교제라고 할 수 있다. 14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헌금을 받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기도한다는 것은 감사의 뜻을 지닌 일종의 중보기도라고 할 수 있다. 15절에서 바울 은 다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2.3. 바울의 모금 행위의 역사적 의미 1) 구제금 모금 운동은 바울의 선교활동 전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돕는 일은 예루살렘 사도회의 때 바울이 결심한 일이다. 2) 구제금 모금 운동은 바울이 세운 모든 교회들 안에서 이루어졌다. 고린도전서 16:1에 의하면 갈라디아교회에도 이 모금 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으며, 마케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교회들의 모범적인 사례를 얘기함으로써 갈라디아, 고린도, 빌립보, 데살로니가 교회 등 바울이 세운 모든 교회들 안에서 시행되었다. 3) 구제금 모금 운동은 일회적인 사건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6:1에서 모금 방식(매주 첫날)을 얘기하는데 이를 예루살렘에 전달하는 것은 단 한 번으로 예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31
  • 32. 4) 구제금 모금 운동은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조심스럽게 실행되었다. 본문에서는 고린도 교회 에서의 모금운동을 마감하도록 디도와 함께 거액의 모금액을 운반하기 위해 두 사람을 동행시 킨다. 이는 오해와 위험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2.4. 바울의 모금 행위의 신학적 의미 1) 구제금 모금 운동은 디아코니아 운동이다. 디아코니아는 섬김, 봉사 등으로 번역되는데, 바울 은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운동에 이 말을 사용한다. 이로써 단순히 물질적으로 궁핍함을 덜어주 는 구제 사업이란 뜻을 넘어서 성도들 상호간에 서로 돕고 섬기는 봉사의 행위라는 것으로 이 해된다. 2) 구제금 모금 운동은 받은 은혜의 나눔 행위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를 위한 모금 은 종종 은혜로 표현되는데 마케도냐 교회들이 가난한 중에도 기쁜 마음으로 풍성하게 모금하 는 헌신적인 태도를 가리키며 하나님이 그 교회에 베푸신 은혜로 표시된다. 3) 구제금 모금 운동은 지역을 초월하여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바울이 세운 모든 이방인 교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표시로서 모금운동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고, 이 헌금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이 베푼 은혜를 받음으로 자신들의 부 족을 보충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은혜를 베푼 자들을 위해 간구하고 그들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이런 행위로써 헌금을 드리는 자와 받는 자 사이 의 연대감이 형성된다. 이것은 개개의 교회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는 역사를 이루는 그리스 도교 역사상 최초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성경이 가르치는 복의 의미 현재의 실용주의적 가치관에서 고려할 때, 시련과 시험, 고난, 등이 없는 상태가 복이다. 이런 복의 개념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널리 퍼져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잘되기만을 위하여 기도한다.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성경이 가르치는 복의 의미를 깨닫기 전에 이미 형성된 토 속 종교의 복 개념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통제하는 가치관으로 남아 있어서 기복 신앙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물질이 많아 진 것이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복의 결과나 경건한 삶의 보상이라고 말할 수 없 다. 오히려 정반대일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에서 배불리 먹고 욕심껏 받았지 만 그들은 욕심을 버리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참조. 시 78:29-31). 이런 경우에 기도 응답이 항상 복은 아니다. 하나님의 복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으로 공동체의 복으로 전해져야 한다. 어떤 특정한 지체 곧 개개인의 성도를 위한 복이라고 할지라도 그 개인이 소속 된 공동체가 함께 누리는 것이어야 진정한 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인의 복지와 안녕만을 위 32
  • 33. 한 극히 제한적인 복의 간구나 추구는 지양되어야 한다. 구약 성서에게 가르치는 복의 개념과 약속들은 신약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영적 복의 중심 내용이 되는 영생에 관한 가르침은 예수 부활 사건 이전에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제한적인 성격이 있다. 이런 점에서 구약 성서는 지상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될 영적인 복을 간접적으로 예시할 필요가 있었다(참조, 시 133:3). 4. 헌금을 위한 재물 사용의 실제 한국 교회의 실정에서 어떻게 헌금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실제적인 제안은 교회의 형편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기본적인 사상과 개념은 다를 수 없다. 교회의 성도라면 물질적인 책임 이 분명히 있다. 이런 관점에서 헌금을 실제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얼마나, 어떻게 헌금하 느냐는 개인의 믿음과 생활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서 획일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 명한 것은 헌금의 의무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나가며 헌금을 드리는 것은 그 사람의 신앙 행위의 단면으로 신앙 고백적 성격을 지닌다. 바울이 가르 치는 헌금 행위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이다. [헌금 및 재물 사용을 위한 권장 독서] •김영봉, 『바늘 귀를 통과한 부자』서울: IVP, 2003. •박철수, 『축복의 혁명』서울: 뉴스앤조이, 개정판, 2007.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 공진호 역, 『돈을 다시 생각한다』서울: 민음사, 2010. •래리 버켓(Larry Burkett), 조성표 역, 『돈 걱정없는 가정』대구: CUP, 1992.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33
  • 34. 신약 바울이 들려주는 십자가의 긍정 이야기 안양대학교 신학과 권연경 교수 대박과 축복 저의 책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 에는 “대박과 축복”이라는 꼭지의 글이 있다. 거기서 필자가 했던 말의 핵심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축복”이 세상이 말하는 “대박”과 너무 닮았다는 것이다. 물론 복이나 축복은 모두 지극히 성경적인 개념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단어들을 성경 자체의 문법을 따라 사용하지 않고 세상이 말하는 “대박”의 문법을 따라 사용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사 용했던 비유를 다시 사용해 보자면, 우리가 부르는 축복의 노래는 사실상 세상이 지어준 곡조를 표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얼핏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 실상은 세상이 추구하는 대박을 따라간다. 다소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실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같은 욕심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종교적 언어로 위장한다는 것이다. 긍정의 힘 긍정적 태도에 힘이 있다는 생각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분명한 확신을 갖고, 흔들리지 않는 태도로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이 그것을 이룰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에서 쉽게 확 인되는 사실이다. 무언가에 대한 의심이나 두려움은 우리의 태도를 어정쩡하게 하고 모호하게 한다. 그러다 보면 무엇이든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우리의 행동이 한 가지 일관된 신념에 이끌릴 때, 우리의 행동은 매우 효과적이 될 것이다. 그만큼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야 기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우리의 격언이 말하는 바도 그와 같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 신념의 효력을 재확인하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무엇을 긍정하고 무엇 에 마음을 모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결혼하기 전 결혼 상대를 신중하게 고르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바치기 전에 무엇에 마음을 바칠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이 중요하다. 내 삶이 잘 못된 가치를 긍정하고, 거기로부터 힘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생명을 향한 능력이 아닌, 죽음 을 향한 파괴력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무엇을 긍 정하고, 또 무엇을 부정할 것인가? 34